조선후기 사회모순과 사회개혁 및 변화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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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 사회모순과 사회개혁 및 변화에 대해 알아보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머리말]
조선후기 사회모순으로 인한 전반적인 변화

[본 문]
1. 실학자의 사회개혁론
2. 외세의 침략
3. 민중의 자주적 구국운동
(동학농민전쟁, 의병전쟁)
참고: 고려와 조선의 농민항쟁 비교
4. 조선후기 농업과 상업, 수취체제의 변화

[끝 말]
요약 및 맺음말

본문내용

토산물을 징수하였던 공물 납부 방식을 토지의 면적에 따라 쌀, 삼베나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하였다.
* 균역법18c:농민들은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하면 되었으며,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부담시키는 등의 해결책을 마련하였다.
전세제도
조선 전기부터는 '연분9등법'이라고 하는 제도였다. 연분9등법이란 그 해가 풍흉에 따라서 세금을 다르게 걷는 것이다. 일단 상중하를 나눈 뒤에 각각을 또 상중하로 나누는 것이다. 그러니 나라에서 올해는 '상상년이다' 라고 하면 1결당 20두 '상중년이다' 하면 1결당 18두 상하년이면 "16두" 이런 식으로 그 해의 세금을 매기는 것이다. 이 연분9등법만 가지고 세금을 매긴 것은 아니고 전분6등법이라는 것을 토대로 이 연분9등법이라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전분6등법이란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서 세금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당시는 시비법이 그리 발달하지 않았기에 토지마다 수확량이 많은 차이를 두었기 때문에 토지마다 등급을(1~6등급)나눈 뒤 연분9등법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제도를 시행하던 중 임진왜란이 터지게 되었다.(모든 수취체제의 변동은 임진왜란 전후에 나타납니다.)그러니 유망하는 사람도 많이 생겨나게 되고, 이러한 것을 막기 위해서 국가에서는 영정법이라는 제도를 실시한다. 영정법이란 풍흉에 상관없이 1결당 4두를 걷는 것이다. 전에는 가장 흉년이 하하년에 4두씩 걷었는데 지금은 무조건 4두씩 걷게 되니 백성들에게는 무척 좋은 일이되었다. 실시 결과 당연히 지주(많은 땅을 가지고 있어 다른사람들에게 땅을 대여하고 지대를 받는 사람)나 일반 양인들의 부담은 덜어지게 되었다.
공납제도
일단 공납제도란 그 지방의 특산물을 세금으로 내는 제도입니다. 일반 양인들 같은 경우는 일단 먹고살기도 바쁜데 특산물도 재배해야 하는 것이 무척 부담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양인들은 농사만 짓고 특산물은 빌려서 냈다. 그래서 이 때 방납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 방납이란 특산물을 빌려주는 것입니다. 이 방납의 폐단으로 인해서 농민들은 점점 몰락해가죠. 역시 유망하는 양인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 해결책으로 나온것이 바로 이 대동법입니다. 대동법이란 특산물을 쌀로 대신 납부할수 있는 것으로, 1결당 12두씩이었는데 양이 많더라도 그 전보다는 훨씬 적은 부담이 되었다. 그 당시 양인들의 평균토지 소유량은 3결정도 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많은 부담이 아니었고, 그에 비해 많은 땅을 소유한 양반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대동법은 시행되기까지 10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원인은 양반들의 반발이다.
대동법의 결과
대동법은 단순히 양인들의 부담을 줄여준 것 뿐만 아니라 상업과 수공업에도 대단한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인하여 특산물대신 쌀이 걷히게 되었지만 왕실에서는 여전히 특산물이 필요했다. 그러니 이 쌀을 다시 특산물(공물)로 바꾸는 기관인 선혜청이 생기게 됩니다. (동법의 원래 명칭이 대동선혜법입니다.) 이 선혜청에서 각각의 상인들에게 쌀을 주고 물건으로 바꾸어 오게 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니 일단 상업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개개인의 능력차이로 인하여 물건을 기일 내에 바꾸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바꾸지 못하는 사람도 생기게 되고, 여기서 부를 축척한 상인을 도고라고 한다. 그러니 상업에서의 계층분화가 일어나고, 수공업도 마찬가지였다.
상인들이 수공업자들에게 물건을 가져올 때 대금의 지불방식은 선대제라고 해서 미리 돈을 주고 물건을 나중에 받아 오는 것이다. 이 대동법 시행후 화폐의 활성화가 이루어진다. 이 화폐의 이름이 상평통보이다.
균역법 시행
양역(군포)의 페단이 심화되면서, 견딜 수 없게 된 농민들은 유망하거나 피역으로 저항하였다. 농민의 유망과 피역은 봉건 국가로서는 국가 기반을 잃는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지배층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 대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즉, 농민의 유망을 법제적으로 막는 호패법이나 오가작통법을 강화하는 한편, 양역(군포)의 폐단을 변통하는 논의를 하였던 것이다.
양역 변통 논의는 숙종 때 본격화되었다. 먼저, 양반에게서 천민까지 모두 군포를 내게 하자는 호포론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봉건적 양반층은, 양반과 상민이 같을 수가 없다고 하여 맹렬히 반대하여 채택되지 못하였다. 호포론을 수정하여 모든 정남에게 군포를 부과하자는 정포론이 제시되었으나, 이것도 양반들의 이해와 엇갈려 폐기되었다. 토지 결수에 비례하여 군포를 부과하자는 결포론도 제기되었으나 이 역시 부유한 양반 지주, 토호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논의는 영조 때 보다 구체화되어 마침내 균역법의 시행으로 낙착되었다. 즉, 감포론에 따라 군포를 2 필에서 1 필로 줄이면서 결포론의 취지에 따라 결작(토지 1 결당 2 두)을 부과하기로 하였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군역의 부담이 어느 정도 고르게 되었다고 해서 '균역법'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한편, 호포론은 그 정신이 나중 고종 때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호포법으로 달성되었다. 즉, 대원군은 양반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군포를 호포로 개칭하여 이것을 양반에게도 징수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이제까지 과세 대상에서 제외되었던 양반들도 집집마다 2 냥씩의 군포전을 납부하게 됨으로써 조세 균등화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된다.
[끝 말]
요약 및 맺음말
내가 조사한 주제는 발표자가 준비한 내용으로만 설명을 들어서, 깊이 있게 아는 내용이 없었다. 그래서 이 주제를 선택하여 준비해보았다. 지금까지 조선후기의 사회적 변화를 각 장르별로 나누어서 보고, 대표적인 주요 변화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렇게 서민의식을 반영한 문학장르들은 나중에 나름대로의 변화를 겪게 되었고, 19세기의 반봉건 항쟁 등 후일 본격적인 민중의식의 성장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임진왜란이라는 민중의 고통이 따랐지만, 다행히 바위를 뚫고 떨어지는 물처럼 많은 개혁과 변화를 일으켰다. 개혁을 꿈꾸고 실현했던 실학자들과 수많은 일반 서민의 항쟁등.. 비록 결과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지만, 그 옛날의 노력으로 오늘날이 있는거라고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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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3.24
  • 저작시기20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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