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처용가(處容歌)[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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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라의 처용가(處容歌)[향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처용가

\'처용가\' 정리

요약 정리

<배경 설화>

<작품의 이해>

<삼국유사>, 권2, 기이, 처용랑(處容郞) 망해사(望海寺)

[내용]

[해설 및 감상]

[소재의 상징성]

[다른 작품과의 관련성]

[요약 정리]

[연구 문제]

[참고 문헌]

향가 처용가

시상의 전개

처용의 생김새

처용가는

고려시대 처용가의 특징

처용가에 대한 다른 해석

감상

배경설화

향가인 처용가 풀이>

<처용가(향가)의 배경 설화와 원문, 현대문 해석>

<향가 처용가와 속악가사 처용가 비교>

본문내용

, 처용은 그 힘을 받은 대행자(무당)였던 셈이다. 그리고 처용은 그러한 주술적 힘으로 각종 국가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시도를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③ 전승과 변화 - 이 노래는 속악가사(고려가요) 처용가에서 보듯이 민간전승과 국가적 전승으로 꾸준히 이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가사도 길어지고 무당이 굿을 하기에 적합하게 각색되었다. 민간에서는 그 후로도 이 노래를 주술적 목적으로 사용하였고, 궁중에서는 이 노래뿐만 아니라 처용의 차림새와 춤을 놀이에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처용가(향가)의 배경 설화와 원문, 현대문 해석>
작가 : 알 수 없음. 노래 부른 이는 처용.
시기 : 신라 헌강왕 5년(879)
제 49대 헌강대왕 대에는 서울에서 동해변까지 집들이 맞닿았으며 담장이 서로 이어졌고 초가는 한 채도 없었다. 길가에 음악이 끊이지 않았고 풍우가 사철 순조로왔다. 이에 대왕이 개운포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물가에서 쉬었는데 홀연 구름과 안개가 캄캄하게 덮여 길을 잃게 되었다. 이상히 여겨 좌우 사람들에게 물으니 점성관이 "이것은 동해의 용이 변괴를 일으키는 것이므로 좋은 일을 행하여 풀어야 합니다" 하였다. 유사에게 칙령을 내려 "용을 위하여 이 근처에 절을 짓도록 하라." 하였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마자 안개가 흩어져 이름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 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 명을 데리고 임금 앞에 나타나서 대왕의 덕을 칭송하며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와 춤을 추었다. 아들 하나를 딸려서 서울로 보내어 왕의 정사를 돕도록 하였는데 그의 이름은 처용이었다. 왕은 미모의 여자로 아내를 삼아 주고 그의 뜻을 사로잡기 위하여 급간의 벼슬을 주었다. 그의 아내는 너무나 아름다워 역신이 탐을 내고 사람으로 변신하여 밤에 몰래 그 집으로 들어가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 노래는 이러하다.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힐隱吾下於叱古
二힐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乙何如爲理古
새발 발긔 다래
밤드리 노니다가
드러사 자리 보곤
가라리 네히어라
둘흔 내해엇고
둘흔 뉘해언고
본대 내해다마란
아사날 엇디하릿고
[梁柱東, 『增訂 古歌硏究』, 一潮閣, 1987.]
서울 밝은 달 아래
밤 늦도록 노닐다가
들어 와 자리 보니
가랑이가 넷이어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었다마는
빼앗아 간 것을 어찌하리오
이 때 역신이 모습을 드러내고 처용 앞에 꿇어 엎드려 말하기를 "내가 공의 아내를 흠모하여 죄를 범했습니다. 그런데도 공은 노하지 않으니 그 미덕에 감복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공의 얼굴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집에는 들어가지 않기로 맹세하겠습니다." 하였다. 이 말에 따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문에 붙여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경사스런 일을 맞는다 하였다. 왕이 궁중에 돌아와 영취산 동쪽에 좋은 땅을 가려 절을 짓고 망해사 혹은 신방사라 했다. 이는 용을 위해서 지은 것이다. 또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남산의 신이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었으나 옆사람들은 보지 못하고 왕만 보았다. 어떤 사람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므로 왕이 직접 신이 추는 춤을 추어서 그 원형을 보여 주었다. 신의 이름을 혹은 상심이라고 하여 지금까지 그 춤을 전해 오면서 어무상심 또는 어무산신이라 한다. 혹은 이미 산신이 나와 춤을 추므로 그 모습을 본따서 공장이를 시켜 조각하게 하여 후세에 전했기 때문에 이름을 상심무 또는 상염무라 한다 하는데 이것은 그 모양을 이른 말이다. 또 금강령에 행차했을 때 북악의 신이 춤을 바쳤으니 옥도근이라 한다. 또 동례전에서 잔치할 때에 지신이 나와 춤을 추었으니 이름은 지백급간이었다. 어법집에 이르되 그때 산신이 나와 춤을 올리며 노래를 부르되 '지리다도파도파'라 한 것은 대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릴 자들이 미리 알고 많이 도망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하리라는 말이었다. 이에 지신과 산신이 나라가 망할 춤을 추어 깨우쳐 준 것인데 사람들은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상서로움이 나타났다고 더욱 탐락에 빠져 나라가 끝내 망한 것이라 한다.
[삼국유사 권2 기이. 처용랑 망해사]
- 발췌 : CD "내사랑 국어"
<향가 처용가와 속악가사 처용가 비교>
1. 속악가사와 고려가요
: 학자에 따라서 고려시대의 노래를 고려가요 혹은 고려속요라 하기도 하고 속악가사라 하기도 합니다. 고려가요라는 명칭은 단순히 '고려시대의 노래'란 뜻이 담겨있고, 고려속요라는 명칭은 노래의 성격을 뜻합니다. 즉 별로 우아하지 않은, 속된 노래란 뜻이지요.
속악가사라는 명칭은 <고려사> 악지에 고려시대 노래를 아악, 당악, 속악으로 분류해 놓은 구분에 따른 것으로, 아악은 국가의 공식행사에 소용되는 노래란 뜻이고, 당악은 당나라에서 들어온 것, 속악은 국내에서 생긴 노래라는 뜻입니다.
2. 향가 처용가와 속악가사 처용가
위의 자료들을 참조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고려시대의 속악가사 처용가는 신라의 향가인 처용가와는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이러한 변모는 원래 향가인 처용가가 주술적 효력을 발휘해 역신을 물리치는 기능을 발휘하자, 그것을 전승시킨 무당들이 굿이라는 행사에 적합하도록 길게 고쳤기 때문일 거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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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 노래는 외형상 한 개인의 정서를 진솔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한데도, 이를 주술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배경설화를 참조하여 설명하라.
--처용의 아내를 범한 장본인이 역신이라는것과 역신이 처용의 아내의 몸을 범한 것은 아내의 몸에 전염병이 들었다는 것이며 처용의 관용에 역신이 물러나갓다는 것은 병이 나았음을 의미한다.
2축신(逐神) 또는 벽사진경( 邪進慶)이라는 주제를 떠나서 이 노래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이라 할 수 있는지 설명하라
-관용이 때론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들수가 잇다.
이에는 이를 대한다는 자세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때론 관용으로 너그럽게 용서가 더 큰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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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5.28
  • 저작시기20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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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1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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