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술의 역사와 감상] 조선말기의 미술의 특징과 작품들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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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조선 말기 역사, 문화, 사회

2. 조선 말기의 미술
- 조선말기의 회화
① 전통의 위축
② 김정희파의 득세
③ 장승업의 화풍
- 회화 작품소개
김정희
조희룡
허유
전기
김수철
남계우
- 조선말기의 공예
- 조선말기의 건축
경북궁 근정전
경희루
독립문
덕수궁 석조전
- 조선말기의 서예부문
작품

참고문헌

본문내용

서 연유하였으나, 두세 짝을 포개놓는 것이 일반화되면서 각 농짝마다 여닫기 편리하도록 문을 앞쪽에 붙였을 것이다. 또 한 옮기기 쉽게 하기 위하여 옆널에 들쇠를 달았으며 바닥의 온기를 마기 위하여 다리를 따로 붙여서 방바닥과 격리시켰다.
⑤ 찬탁 : 반찬이나 찬거리 등을 얹어두는 두세 층의 탁자로, <산림경제>에 부엌세간의 하 나로 기재되어 있다. 소나무, 잣나무를 사용하여 굵은 각목으로 기둥을 삼고 층 널 역시 두꺼운 것이 트객이다.
- 조선말기의 건축
경북궁 근정전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역대 국왕의 즉위식이나 대례등을 거행하던 곳으로, 1395년에 지은 것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 현재의 것은 조선 말기인 1867년 11월에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것이다. 다포양식의 건물로, 현존하는 최대의 목조건물이다.
경희루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이다. 조선의 정궁인 경북궁이 창건된 것은 1395년으로, 이때 경희루 주위에 작은 연못이 조성되었고, 1412년 태종의 명에 의하여 큰 방지를 파고 경회루를 창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서 273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재건되었다. 방지의 크기는 동서가 128m, 남북이 113m인데, 못 안에 방형의 섬을 만들고 거기에 누를 세웠다. 이 섬에 들어가는 3개의 석교가 있는데, 모두 하엽동자에 회란석을 섬 주위까지 돌렸다.
독립문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 3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고종 광무 원년 1897년에 건설되었고재료는 화강석이다. 현재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941에 위치해 있다.
독립문은 갑오경장 이후 자주독립 결의를 다짐하며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사대외교의 상징인 영은문을 헐고 세워졌다. 따라서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19세기 말 자주민권 자강운동의 한 기념물이다.
독립문의 건축양식은 서재필이 구성하여 기본적으로 프랑스 파리에 있는 개선문을 참고로 이루어진 것이며, 비용 때문에 개선문보다 축소되었다. 서재필의 자서전에 따르면, 문의 설계는 당시 독일 공사관에 있던 스위스 기사가 담당하였고, 공사는 우리나라 목수인 심의석이 맡아 시공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경성부사>>에는 러시아 사람인 사바친이 했다고 하여 어느 쪽이 옳은지 분명하지 않다.
독립문은 좌우에 화강석 돌기둥을 세우고 중앙에 홍예를 설치하였다. 그 한쪽에는 내부로 드나들게 출입문을 두어 옥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으며, 상부에는 돌난간이 돌려져있다. 이맛돌에는 대한제국의 문장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문 정면과 뒷면에는 좌우에 태극기가 새겨지고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현판석이 있다.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 1979년 성산대로가 개설되면서 원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정도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세우고,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문 앞에는 영은문 주춧돌(사적 제 33호) 1쌍이 서 있다.
덕수궁 석조전
기본설계는 영국인 G.D.하딩, 내부설계는 영국인 로벨이 하였으며, 1900년에 착공하여 1910년에 완공되었다. 3층 석조건물로 정면 54.2m, 측면 31m이며,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 및 홀,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거실,욕실 등으로 사용되었다. 앞면과 옆면에 현관을 만들었다. 기둥 윗부분은 이오니아식,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한 서양식 건축기번이 특이하다.
이 건물은 앞에 있는 정원과 함께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의 궁전건축양식을 본뜬 것이며, 당시에 건축된 서양식 건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건물이다. 이곳에서 1945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며, 6.25전쟁 이후 1986년까지 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다. 동관에는 궁중유물전시관이 있었으나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건립되면서 이전했고, 2007년부터 국립근대미술관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서관에는 국립현대미술관 본관이 1998년 12월에 개관되어 덕수궁미술관이란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 조선말기의 서예부문
김정희가 등장하여 왕법 중심의 종래 첩의 성과에다 왕희지 이전에 만들어진 한예 중심의 비를 녹여낸 추사체를 창안함으로서 당시까지의 서예사 전개맥락을 뒤집어 놓았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서예는 18세기 말기의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등의 북학파 실학자들을 통해 소개된 청대 고증학파의 신서학 경향이 김정희에 의해 추사체로 완성되어 크게 유행했다. 김정희는 처음에 안진경체과 동기창체에 토대를 두었으나 서법의 근원을 전하예에 두고 이 서체를 해서와 행서 등에 응용하여 청나라의 비학파들도 염원하던 이상적인 새로운 양식을 창안했다.
조형성과 예술성에서 뛰어났던 그의 이러한 추사체는 신천, 이하응, 서상우, 조희룡, 이상적, 허유, 전기, 오경석 등의 추사파 서화가들을 통해 일세를 풍미했다.
작품
봉은사 김정희서판전현판
조선 19세기 전반의 대표적 문인서화가 김정희가 만년에 쓴 봉은사판전의 현판 필적이다. 김정희는 노년에 경기도 과천의 과지초당에 머물면서 봉은사에 자주 들리곤 했는데, 구전에 따르면 이 글씨를 사망하기 사흘 전에 썼다고 한다. 만년의 순수한 모습이 드러나 있는 듯한데, 세간에서는 이 글씨체를 동자체라고 부른다. 파란의 생애를 겪으면서도 학문과 서화에 침잠했던 그의 진중한 모습이 담겨져 있는 듯하다. 편액 왼쪽의 낙관에 “七十一果病中作(일흔 한 살의 과가 병중에 쓰다):라고 했는데, 여기의 ‘과(果)’는 그가 노년에 과천에 살면서 사용했던 호인 果道人,果老,老果 등에서 나온 것이다.
참고문헌 :한국 미술 문화의 이해 / 김원용 / 예경
한국 미술사/ 김명주 / 나남
한국미술사 이야기 / 박용숙 / 예경
한국 미술의 역사 : 선사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김원용 / 시공사
1. 조선 말기 역사, 문화, 사회
2. 조선 말기의 미술
- 조선말기의 회화
① 전통의 위축
② 김정희파의 득세
③ 장승업의 화풍
- 회화 작품소개
김정희
조희룡
허유
전기
김수철
남계우
- 조선말기의 공예
- 조선말기의 건축
경북궁 근정전
경희루
독립문
덕수궁 석조전
- 조선말기의 서예부문
작품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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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6.28
  • 저작시기20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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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17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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