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경제, 문화, 정치,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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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경제

Ⅱ. 정치

Ⅲ. 대외관계

Ⅳ. 문화

Ⅴ. 참고자료

본문내용

성리학자가 아니라 民族主義的 新儒學者(Nationalistic Neo-confucianist)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통 성리학자라고 할 수 있는 사림파들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성리학이 가지고 있는 한계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시기를 대략 16세기 후반기부터라고 보고 있는데, 이 이후 성리학은 그 자체의 한계성에 의해 국가의 지도이념이 아닌 단순히 哲學的인 論爭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철저하게 현실과 괴리되어 형이상학적인 논쟁에 빠져있던 성리학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양란을 겪은 이후에 조선사회가 中世的 要素를 극복하고 近代로 이행하려고 하는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역사의 발전에 있어 방해를 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즉 성리학이 가지는 폐쇄적이며 배타적인 요소로 인하여 조선후기에 도입된 陽明學이나 西學을 수용하지 않았으며 조선 내부의 문화적인 발전도 억압하였던 것이다. 중세 봉건사회에서 근대로의 이행과정에 있어 유학(엄밀히 말하면 성리학)이 가지고 있었던 폐쇄성은 분명 발전의 저해요소였다. 성리학이 시작되었던 중국의 경우 명청교체기에 출현한 양명학이 성리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나은 다음 세계로의 이행을 위한 철학으로 등장하였다.
양명학의 기본사상은 왕양명이 龍場에 유배되어 있을때 체득한 心卽理에 있다고 말해진다. 주자학이 대응하고 있던 구래의 사회관계가 하나의 위기를 맞고 있던 명말에는 지배질서의 근거를 초월적, 객관적인 성즉리에서 구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점차 파괴되어져 갔고 格物, 窮理에 의해 이,기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지배질서와 그 안에서의 각개의 지위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방법은 지배질서 그 자체의 동요에 의해 곤란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 직면한 양명학은 주자학에 의하여 지정된 理의 外在性을 부인하고 규범으로서의 理는 性과 情의 혼연일체인 心의 가장 지순한 것, 곳 良知임에 틀림없다고 하여 理의 內在化, 內面化를 주창하였다. 이것이 심즉리라고 말하여 지는데 사회질서를 규제하는 논리도 주자학에 있어서와 같이 외부로부터 부여된 규격의 준수가 아니고 인간본래의 본성, 즉 양지의 自發的인 發露로 되었으며, 그것은 정적인 인식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루 하루의 실천에 의해 검증되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知行의 合一, 主體的 能動性이 강조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성리학에 있어서 초월적, 객관적인 규범이었던 천리가 양명학에 있어서는 각 개인의 마음의 주체인 양지가 됨으로써 거기에서 가치기준의 전환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와 비교하여 조선의 경우 근대로의 이행과정에서 성리학의 폐쇄성 때문에 양명학이 조선후기에 도입되지를 못하면서 조선사회는 근대로의 이행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17,8세기에 벌열정치가 행해지면서 소수 양반가문이 정권을 독점함으로써 말미암아 많은 몰락양반들이 생기고 있었으며, 농촌에서는 廣作에 의한 부농이 생기는 한편 영세농들은 이농을 강요당하여 유민의 수가 늘어났다. 또 도시에서는 도고상인들이 상공업을 지배하여 부를 축적하자 영세상인들은 몰락하고 물가가 앙등하는 등의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당시의 조선사회가 당면한 이같은 사회현실은 이에 대응하기 위한 학문적 반성을 촉구하였다. 이같은 반성속에서 새로이 일어난 학문이 實學이었다.
실학자들은 주로 정치, 경제, 사회 등의 역사와 현실을 밝히는데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그러한 학문적 연구를 토대로 하고 理想的 社會를 실현하기 위한 구상을 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실학의 연구대상은 반드시 정치와 경제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학문적 분야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그들의 연구대상은 다양하였지만 실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기반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학문이 現實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그들 학문의 중심은 이기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이나 기술학의 부분에 있었다. 이렇게 학문의 대상이 현실적인 것이 되면 그 방법도 변할 수밖에 없었다. 즉 실학자들의 연구방법은 實證的이었다. 모든 결론을 확실한 전거에 의해 내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과거의 전통이나 스승의 주장에 맹종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의 연구성과와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선학의 학설이라도 거리낌없이 비판하였다. 이는 왕양명이 '마음으로부터 구하여 옳지 않을 때는 비록 공자의 말이라 하더라도 옳다고 할 수 없다'라고 하여 自我의 自立과 그것에 의한 權威批判과 비교가 되고 있다.
이렇듯 실학은 대외적으로 對淸, 對日외교의 안정기조속에서 내재적 발전을 추구하려는 의도에서 발생하였으며, 대내적으로는 근대로의 이행기에 있어 조선내부의 시대적 요청에 있어 발생한 것이었지만, 이들의 사상이나 주장들은 실학파 자신들이 그들의 정치적 역량을 펼 기회가 많지 않았으므로 현실정치에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았으며, 이들의 주장에는 개인적인 울분에 대한 토로같은 요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실학의 의미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사회는 끊임없이 발전하여 왔으며 그러한 과정속에서 古代的 要素를 극복하는데 있어 性理學을 수용한 것이었고, 中世를 극복하고 近代를 지향하기 위해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성립해 내었던 것이다. 이 실학의 의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형원이 '반계수록'을 편찬하였고, 이익이 '성호사설'을 저술하여 사회개혁을 열거하였다는 등의 단순한 사실의 열거가 아니라 그 실학이 가지는 近代志向的인 의미라고 생각을 한다.
상술하였듯이 실학자들은 그들의 연구에 있어서 반드시 과거의 전통에 얽매이려 하지 않는 실증적 방법론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근대지향적인 요소인 것이다. 즉 중세가 絶對的인 要素를 강조하는 시기였다면 近代는 보다 자유스러운, 즉 人間이 自己의 主體性을 찾아가는 시기라고 할 때 실학은 그 방법에 있어서나, 혹은 실현가능과 불가능의 문제를 떠나 그러한 사상자체로서 한국사회의 발전에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Ⅴ. 참고자료
이기백. 한국사신론
윤남한. 조선시대의 양명학연구
한국사연구회. 한국사연구입문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한국사특강
신서원 편집부. 동양사의 기초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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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08.01.13
  • 저작시기2008.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47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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