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민주의]식민지시대 조선총독부의 조선유교지배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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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목 차 ]
1. 문제제기

2. 일본과 조선유교
2.1 유교의 전래
2.2 일본과 조선유교

3. 조선총독부의 조선유교지배 정책의 전개
3.1 준비기-통감부 시대
3.2 경학원체제의 형성
3.3 경학원체제의 발전
3.4 경학원체제의 파탄

4. 결 론

참고 문헌

본문내용

국대학의 개설과 동시에 조선어.조선문학강좌의 교수로서 1939년까지 활약했다. 경학원과의 관계를 보면, 경학원설립과 함께, 동 기관지 經學院雜誌의 顧問으로 일했고, 그 후에도 경학원에 유교교육기관인 명륜학원이 설치된 후에는 講師 및 評議員으로 그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 그리고 말기에는 經學院提學 겸 明倫練成所長, 朝鮮儒道聯合會副會長을 역임했다. 패전과 함께 일본에 귀환한 후에는 대학교수로 근무하면서 일본 朝鮮學의 權威로 한동안 활약한 인물이다.
그에 따르면, 일본은 世界唯一의 特別國家로서 '萬國無比의 國體' 즉, 한 번도 易姓革命을 경험하지 않은 天皇家(皇室)을 국가의 윤리적, 정신적, 정치적 중심으로 보유하고 있다. 天皇은 天地大神의 후예이며, 皇室은 일본국가의 總本家이다. 이러한 천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政治가 곧 皇道이며, 공자 맹자가 논하는 중국의 王道와는 완전히 이질적이다. 일본의 國體는 그 정당성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며, 단지 玄妙하다고 말하는 것외는 도리가 없다. 조선민중의 국민정신을 일깨우고 국민도덕을 內鮮一體로 추진해 감에 있어, 朝鮮의 儒敎는, 일본의 國粹에 충분히 同化된 皇道的 儒道가 아니면 안된다. 중국유교의 정치사상인 易姓革命禪讓放伐을 배제하고, 孝를 忠보다 중히 여기는 도덕사상을 부인하고, 忠孝一體를 도덕의 골자로 해야만 한다. 그리고 조선유교는 중국을 中華로 숭배하는 전통을 폐지하고 日本을 中朝로 삼아, 日本歷史의 精華 즉, 日本皇室을 崇尙하지 않으면 안된다[高橋1939].
高橋의 '皇道儒道'論은 한마디로 論理의 破壞이며 理性의 破綻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와같은 空虛하고 荒唐無稽한 皇道儒道의 理念을 기초로 하는 이상, 경학원체제는 사회교화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상실, 破綻의 국면에 들어섰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이러한 無理를 감행해 가면서, 일본식민지주의는, 조선유교를 식민지통치와 대륙전쟁을 위한 조선민중동원에 최후까지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4. 결 론
이상 검토한 것처럼, 조선총독부의 조선유교지배는, 경학원을 중심으로 지방의 향교와 행정기구를 이용하여 조선유림세력을 민족동화정책과 총독정치의 선전에 끌어들이려는 것을 주안으로 하였다. 그것은 고도로 억압적이며 극단적인 形式主義를 특징으로 하였으며, 종국적으로는 비합리적인 神話的 空虛로 疾走하는 양상을 露呈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총독부의 조선유교지배의 실상은, 일본식민지주의의 교육문화적 지배의 본질을 如實히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식민지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조선유교는 분명히 '효용'이 있었다. 당시 조선인들의 맹렬한 반일민족주의의 사상적인 바탕은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외량의 서양사상이었던 것이다. 조선의 유생들도 구한말이래 위정척사나 반일의병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실은 있지만, 1910년이후에 있어서는 조선인의 민족주의는 주자학적 유교가 아니라 서구적 합리주의-자유주의, 기독교적 인도주의,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를 정신적 바탕으로 했던 것이다. 조선의 주자학적 '정통파'유림들에 있어 이러한 '외래사상'은 용인할 수 없는 위험한 사상이었던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입장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외래사상'은 非國家的이며 非日本的인 思想이었다. 守舊的이고 傳統的인 天皇制政治秩序를 國體로 떠 받드는 이상, 일본식민지주의에 있어, 조선의 정통파적 유림세력은 서양종교를 믿고 마르크스를 숭배하는 反抗的인 조선인들에 비하면, 훨씬 자기네와 가까운 距離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유교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조선말기에 이르러 주자학중심의 정통파유학과는 思考의 軌를 달리하는 實學的 學風이 대두하였고, 그것의 영향으로 근대사회로의 이행기에는 開化思想이나 東學과 같은 보다 近代的인 사상들이 內發的으로 형성되어 나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한 근대지향적 유학과는 달리, 주자학중심의 '정통파'적 유학은, 신채호의 지적대로, 우리나라를 '孔子의 朝鮮', '朱子學의 朝鮮'으로 만드는데 공헌했을 뿐, '朝鮮의 孔子'나 '朝鮮의 朱子學'을 제시하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가 被植民地化를 경험하지 않고, 近代로의 移行이 우리의 주체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 질 수 있었다면, 그때 조선왕조시대의 遺物인 정통파적인 유교는 어떠한 변용과정을 거쳤을까? 당시 중국의 예와 같이, 일단은 철저한 儒敎批判과 儒敎否定의 프로세스가 우리나라에서도 진행되지 않았을까?
본고는 조선총독부라는 식민지통치권력이 조선유교를 어떻게 지배하려고 했는가 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에 따라 자연히 식민지민중이 그러한 支配의 試圖에 대하여 어떻게 反應했으며 抵抗했는가 라는 문제는 추구되지 않았다. 그리고 정책면에 있어서도 지방에 있어서 그러한 정책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 혹은 좌절되었는가 라는 문제 즉, 과연 支配는 植民地權力의 意圖대로 貫徹되었는가 라는 문제도 다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조선유교의 位相을 당시 대만이나 만주지역에 있어서의 유교의 그것과 비교연구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문제들은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하고 싶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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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1.11
  • 저작시기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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