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의 이해 요약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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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주장하며 통일문제에 적극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보수세력과 구별되는 공통성이 있었다.
3. 1950년대 사회변화
가. 1950년대 한국경제
1) 농지개혁
해방 뒤 남한에서는 식민지 경제구조와 반(半)봉건적 토지소유 관계를 청산하고 민족자립경제를 이루는 것이 큰 과제였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 토지개혁이 중요했다. 미군정 3년 동안 일본인 소유 토지만을 처리한 채 토지개혁은 이승만정권으로 넘어왔다.
정부는 재정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구실로 농지개혁법을 미루다가 1950년 3월 10일 국회에서 보상액과 상환액을 평년작의 1.5배로 하며 상환기간을 5년으로 하는 농지개혁안을 통과시킨 뒤 실시하였다. 귀속 농지는 무상몰수 유상분배로, 조선인 지주의 농지는 유상매입 유상분배로 원칙을 세웠지만 농민들은 땅값으로 1년에 평년작의 30%를 내야 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무거운 부담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농지개혁이 해방 뒤 5년이나 지난 뒤에 실시되어 그 의미가 크게 줄어들었다. 이미 지주들은 농지개혁을 피해 많은 소작지를 팔아버리거나 논밭인 땅을 과수원이나 염전, 미개간지로 변경해 농지개혁 대상에서 빼버린 상태였다. 그리하여 1966년 농지개혁으로 분배된 면적은 해방 때 소작지 면적의 38%인 약 55만 971정보에 지나지 않았다.
이승만정권이 실시한 농지개혁은 농민들에게 불합리하게 진행되었지만 반봉건적인 지주적 토지소유제도를 기본적으로 해체하였고, 자본주의 발전을 크게 촉진시켰다. 농지개혁은 계급으로서의 지주를 거의 없앴고, 많은 수의 자작농을 창출하였다. 지가증권 투매는 관료독점자본의 축적을 촉진시켰다. 농민들에게서 저곡가를 통한 수탈, 조세수탈, 인플레이션에 의한 수탈로 거두어들인 재원이 재벌들에게 특혜로 제공됨으로써 농촌은 독점자본의 축적 도구가 되었다.
2) 원조 경제
50년대 이루어진 미국의 경제원조는 한국사회의 경제구조를 재편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미국이 군정시기와 이승만 정권기에 걸쳐서 한국에 제공한 경제원조는 무려 31억 달러 에 이르렀다. 이 원조는 친미반공정권을 유지하고 육성하는 자금원이자 한국을 미국의 잉여농산물 처리장으로, 미국 군수산업의 생산물인 무기의 시장으로, 대공산권 방어기지로 만드는 재원이었다.
원조물자 가운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던 미국농산물은 농업경제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잉여농산물을 원조로 한 것은 한국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고자 한 뜻도 있었지만, 1948년 뒤부터 계속된 미국의 농업공황에서 벗어나려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여기에다 이승만정권이 정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농산물을 들여옴으로써 농업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한국정부는 이 원조물자를 마음대로 처리할 수 없었다. 일단 원조물자가 오면 정부는 그것을 판매한 뒤 그 대금을 대충자금(代充資刻)이라 하여 적립해야 하였다. 이 대충자금은 한·미 합동경제위원회의 철저한 통제를 거친 뒤 쓸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미국은 정부와 한국경제를 적절히 통제하였다. 정부재정 가운데 절반이 넘는 대충자금은 미국에서 무기를 사들이는 등 주로 친미반공정권을 유지하는 데 쓰였다.
50년대 한국경제는 원조경제를 통해 철저히 미국에 종속되어 갔다. 공업화부문도 삼백산업과 같은 소비재 중심이었고, 국내의 농업과 아무런 연관을 갖지 못한 채 원자재를 미국에 기대야 하는 파행성을 띠었다. 공업발전에 필요한 시설재도 미국 독점자본의 상품이었다
나. 1950년대 사회와 문화
1)사회이동의 가속화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거주지의 이동을 경험했으며, 또한 고아·과부 등의 결손가족이 많이 발생하였다. 즉, 한국전쟁중 월남한 이북 사람들은 주로 하층민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남북한에서의 토지개혁과 대규모의 인구이동은 사회구조적으로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봉건적인 지주계급은 사실상 소멸되었고 농민들은 이제 국가권력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다. 농지개혁과 전쟁으로 지역공동체는 붕괴되었고, 전통적인 생활공동체는 파괴되었다. 이제 전통적인 가족공동체의 규범도 소가족과 개인을 중심으로 변화해 갔다.
1950년대 도시화는 급속하게 진행되어 1960년에는 도시화율이 28%에 이르렀다. 특히 전쟁과 농촌의 피폐는 도시로의 인구이동을 가속화시켰으나, 도시빈민으로만 퇴적되었다. 특히 1950년대 후반 제대군인이 늘어나면서 도시주변부 계층은 현저하게 증가되었다.
2) 냉전인식의 심화와 서구식 대중문화의 확산
지식인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체제대결의 냉전적 현상을 가장 현실주의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미의존과 군사적 봉쇄와 반공을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고는 또한 한국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하는 대미의존적 의식을 일반화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식인들의 방황은 당연한 것이었다. 반공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지적 풍토속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의 명분적 역할밖에 할 수 없었다.
지성계는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성과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공산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민주주의의 보편적 원리의 실현을 주장하면서 독재를 공격하기도 했다. 여기에 사회의 구조적 부패에 대하여 인식하고 '민중' 주체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이 싹트기도 했다. 또한 학생운동 일각에서는 '사회민주주의'의 수용을 조심스럽게 타진하는 움직임도 일었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중화주의적 천하관은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미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는 새로운 천하관으로 변화했다. 미국은 한국의 우방이고 혈맹일 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자유롭고 부강하며 선진적인 문화를 가진 나라이며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즉 미국적인 것 또는 서구적인 것은 근대적인 것 또는 현대적인 것이고 배워야 할 것이라는 의식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저질대중문화의 무조건적인 수용과 그에 대한 한국인들의 굴종과 아부에 대한 반감이 일기 시작했다. 한미간 행정협정의 체결을 촉구하거나, 미국 문화의 양면성에 대해 주목하고 균형적인 수용을 주장하는 자각이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다. 미국의 민주주의와 인도주의 그리고 개인주의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것은 미국에 대한 균형적인 시각의 확보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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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3.08
  • 저작시기2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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