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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시대][고려]고려시대(고려)의 건국신화, 고려시대(고려)의 행정조직, 고려시대(고려)의 가전체문학, 고려시대(고려)의 문벌귀족, 고려시대(고려)의 상속제, 고려시대(고려)의 촌락구조, 고려시대(고려)의 건축 분석(고려시대, 고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고려시대(고려)의 건국신화

Ⅱ. 고려시대(고려)의 행정조직

Ⅲ. 고려시대(고려)의 가전체 문학

Ⅳ. 고려시대(고려)의 문벌귀족
1. 고려 귀족 사회의 형성
2. 공음전
3. 음서 제도

Ⅴ. 고려시대(고려)의 상속제

Ⅵ. 고려시대(고려)의 촌락구조

Ⅶ. 고려시대(고려)의 건축
1. 만월대(滿月臺)
2. 선죽교(善竹橋)
3. 고려 태조 현릉(太祖 顯陵)
4. 공민왕릉(恭愍王陵)
5. 개성 첨성대(開城 瞻星臺)
6. 구주성(龜州城)
7. 대흥산성(大興山城)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 아래에는 정자각이 있으며 능의 원찰인 광통보제선사의 탑과 비가 있다.
이 정자각은 전에 없어져 터만 있던 것을 최근에 새로 복구한 것이다. 무덤칸은 무덤 안길과 안칸으로 이루어진 외칸무덤이다. 안칸의 벽면은 잘 다듬은 화강석 판돌을 한면에 하나씩 세워 만들었으며 천정은 3개의 판돌을 덮어서 평천정을 하였다. 동, 서, 북 세 벽면에는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하는 12지신상 벽화가 각각 4상씩 배치되어 있다. 12지신상은 구름을 타고 손에 홀을 쥐었으며 머리에 관을 쓴 인물로 형상화하였다. 관 위에는 각기 자기 방위에 해당하는 동물의 머리가 그려져 있다. 천정에는 하늘을 상징한 해와 북두칠성, 그리고 한 쌍의 3성을 그렸다.
안칸의 동벽에는 높이 43cm, 너비 38cm의 문을 새기고 그 밑에 방형의 구멍을 뚫어 정릉과 통함을 나타냈다. 공민왕릉의 건축과 설계에는 당시 고려 사람들이 도달했던 수학 및 천문지리, 석조 건축기술, 조형예술 수준이 종합적으로 집성되어 있다. 실로 공민왕릉은 지난 시기의 우리나라 역대 무덤건축과 석조 조각기술의 극치를 자랑하는 최대의 걸작으로 동양문화사에서 당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5. 개성 첨성대(開城 瞻星臺)
첨성대는 고려 왕궁터인 만월대 서쪽에 있다. 지금 여기에는 천문관측 기구를 올려놓았던 축대만이 남아 있다. 축대의 높이는 2.8m이다. 축대는 주춧돌 위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네모나게 다듬은 대돌로 <ш>형 틀을 짠 다음 틀 사이에 판돌을 깔아 만들었다. 축대의 네면은 첨성대의 중요한 방위 기준이 되도록 동, 서, 남, 북 방향과 일치하게 하였다. 축대는 부재들의 다듬새가 치밀하고 그 구조가 견고하다. 특히 대돌과 판돌은 서로 빈틈없이 맞물려졌는데 남북 모서리에는 아령모양의 홈을 파고 알맞은 철편을 끼워 튼튼히 연결시켰다. 이러한 구조는 나비사개 이음방법을 석구조에 도입한 것으로서 당시 석조 기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 준다.
축대 위에는 모서리마다 큰 구멍이 있고 그 밖에도 여러곳에 작은 구멍들이 뚫어져 있다. 이 구멍들은 관측시설을 고정시켰던 자리인 듯 하다. 개성 첨성대는 경주 첨성대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천문현상에 대한 관측 사업을 오래전부터 끊임없이 진행하여 왔다는 것과 세계적으로도 높은 수준에 있었던 고려 천문학의 발전모습을 실물로 밝혀 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6. 구주성(龜州城)
구주성(구성)은 구성시 북쪽에 솟은 이구산의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쌓은 석성이다. 구주성이란 성벽으로 둘러막힌 이구산의 산줄기들이 가로 세로 뻗어 마치 거북이의 잔등 무늬처럼 생겼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주성은 이 시기 압록강에서 청천강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길목을 지키던 성이다. 선조들의 용맹한 넋이 어린 구주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졌다. 내성이 구주성의 본성이고 외성은 그 후 서쪽에 덧붙여 쌓은 것이다. 내성의 둘레는 약 5km이고 후에 쌓은 외성 성벽의 길이는 약 1.5km이다. 산능선 일대의 성벽 축조에는 능선의 바깥면을 깍아내고 거기에 성돌을 대는 외면 축조방법을 썼다. 현재 그 성벽의 높이는 약 5m정도이다. 이 석성 벽은 성돌들 사이를 삼화토로 메꾸어 성벽이 매끈하도록 공들여 쌓은 것이 특색이다.
<고려사>에는 이 성의 치만 하여도 41개나 있다고 쓴 것으로 보아 구주성의 성벽들에는 원래 성가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성곽시설들이 튼튼히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구주성에는 내성에 남문과 동, 서, 북문터, 외성에 서문터 그밖에 4개의 사이문터가 있다. 내성과 외성사이에는 두 성을 연결하는 이 성에서만 보이는 고유한 형식의 지하문터가 있다. 구주성 남문은 지난 전쟁때 파괴되었었다. 지금것은 1979년에 원래 모습대로 복구한 것이다.
성안에는 샘물이 풍부하며 그것은 남문 동쪽에 있는 수구문으로 흘러내린다. 구주성에는 동쪽과 서쪽, 남쪽에 장대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 거장대가 제일 높고 전망이 좋아 전투를 잘 지휘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성의 동쪽과 북쪽의 능선을 감돌아 흐르는 동문천은 자연적인 해자로 되어 성의 방어력을 더욱 높였다. 옛날 우리 선조들은 구주성을 지켜 용감하게 싸웠다. 그 가운데서도 1011년 1월과 1019년 2월 거란침략을 물리친 역사적인 구주 대승리, 1231년 봉건 몽골의 제 1차 침략을 반대하여 5개월간이나 싸워 끝내 적을 격퇴한 구주성 전투들은 우리 선조들의 투쟁역사에서 빛나는 자리를 차지한다.
7. 대흥산성(大興山城)
대흥산성은 고려의 수도방위를 위하여 쌓은 성인데 이 산성은 대흥산의 산성골을 안에 넣고 천마산, 청량봉, 성거산, 인달봉 등 높낮은 봉우리들을 이어가며 쌓은 석성이다. 성의 둘레는 약 1만 100m이다. 성벽의 높이는 보통 45m이고 골짜기를 넘어서는 지점은 68m이다. 성벽 위에는 성가퀴를 쌓았고 성벽에는 10개소에 치를 두었다. 성의 동, 서, 남, 북 네면에는 큰 성문들을 두고 그 사이에 사이문과 암문들을 냈다.
문들 가운데서 보존상태가 좋은 것은 박연폭포 곁에 있는 북문이다. 이 문은 무지개 문길이 있는 높은 축대와 그 위에 세운 문루로 이루어졌다. 문루는 후세에 고쳐 지은 것이다. 이 성에 있는 4개의 수구문 가운데서 대표적인 것은 역시 박연폭포를 이루는 북쪽 수구문이다.
성 주위의 높은 봉우리들에는 장대처가 있고 성의 서북쪽에는 망루터가 있다. 성 안에는 본영인 제승당 터와 그밖에 병실 병기창고, 식량창고 등의 집터가 있다. 그리고 관음사와 대흥사의 일부가 잘 보존되고 있다. 대흥산성에는 11세기초 거란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을 비롯하여 외적들을 반대하여 싸운 우리 선조들의 용감한 투쟁 사실이 깃들어 있다. 대흥산성은 고려시기 수도방위 체계와 축성기술 그리고 선조들의 애국주의정신을 알게 하는 가치 있는 유적이다.
참고문헌
ⅰ. 고려전기의 정치구조 국사편찬위원회
ⅱ. 고려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국사편찬위원회
ⅲ. 금광철(1991), 고려후기세족층 연구, 동아대출판부
ⅳ. 노명호(1988), 고려사회의 양측적 친족조직 연구, 서울대박사학위논문
ⅴ. 박경안, 고려말 유자들의 전제 개혁론에 대하여
ⅵ. 오종록·박진우, 고려말 조선초 향촌사회질서의 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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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3.16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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