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정치사상
본 자료는 9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해당 자료는 9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9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유럽 기독교 세계의 성립
1.1 중세의 정치세계
1.11 정치문화의 제 원리
1.12 정치권력의 정당성
1.2 피핀으로부터 샤르마뉴에로
1.21 정당화 원리의 전환
1.22 샤르마뉴; 정치와 종교의 혼합
1.23 그리스도교의 우주론
1.3 기독교와 정치
1.31 기독교의 보편성
1.32 기독교의 정치적인 친화성
1.34 기독교의 정치사상사적 의의
1.4 오거스틴의 정치사상
1.41 역사철학
1.42 국가관
1.5 교황권과 황제권
1.51 교황권
1.52 황제권
1.6 봉건제
1.61 오래 된 좋은 법
1.62 법의 지배와 지배자

2. 보편의 확립

1. 토마스 아퀴나스
1.1 목적론적인 질서
1.2 국가의 목적으로서의 공통선
1.3 혼합정체
1.4 교회와 세속권력
2. 단테
2.1 국가의 목적
2.2 황제론
3. 특수의 발생과 전개
3.1 아리스토텔레스정치학의 전개
3.2 정교의 분리

2. 윌리엄 오컴
2.1 유명론
2.2 세속적 권력의 독립

6. 공의회운동 - 「중세의 종말」의 시작
1. 정치사 ․ 시대상황
1.1 로마교회의 권위의 쇠퇴

3. 공회의주의의 정치사상
3.3 공회의주의와 입헌주의

본문내용

자세 사고방법은 명확하게 법단체로서의 교회의 머리(즉 로마교황)가 독단적으로 교회전체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며, 게다가 또한 이상사태가 계속되는 중에서 문제해결의 방법은 정상시의 체제적인 논리에 준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명시하였던 것이다(@61).
3. 공회의주의의 정치사상
전술한 것처럼 13세기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이 수용되고 전개되었다. 이 철학의 대전제는 인간들이 폴리스 정치공동체이 목적이 ‘선한 생활’을 향유하기 위하여 그 공동체에 참가하여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상적인 영향으로서 인간은 ‘영원한 지복’이라는 선한 목적을 획득하기 위하여서는(@61), 공동체로서의 교회에 참가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리고 교회의 선하게 존재하는 방법은 그 중에서 목적을 획득하려고 하는 신앙자 자신이 결정하여야 하는 것이다(@62).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수용한 철학자들은 교회권력을 가진 자들은 ‘신앙자 집단’(congreatio fidelium), 즉 교회전체의 것이며, 이 교회전체를 대표하는 공회의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성직자 계층제도의 전부의 부분에 우월하는 권위와 권력을 보유한다고 주장하였다. 파리의 요하네스??(Jean de Paris, 1250(-54) - 1306), 마르실리오 파두아가 이러한 유의 사상가 집단의 대표자였다(@62).
3.1 공회의주의
공회의주의의 이론을 총괄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1. 교회는 기독교의 신체이며, 그의 참다운 머리는 예수이다. 교황의 지위는 머리가 되는 기독교에 종속이 된다.
2. 교회는 보편적인 존재이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여된 그 근원적인 권위는 모든 신앙자의 집합체인 교회 전체에 속하는 것이며, 교황에는 속하지 않는다.
3. 신앙자 모두의 대표로부터 구성된 공회의는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지고권’(Plenitudo Potestatis)을 부여받아, 이것은 교황의 권위와 권력보다도 우월하다(지고권은 교황이 교회통치를 위하여 발휘하는, 최고로 하는 최선의 권위와 권리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며, 나중에 절대왕정에 있어서 국왕에 비교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히려 국왕의 주권이론과 실제의 정
치화 체계화에 크게 영향을 부여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4. 공회의는 예수에 의하여 지도되고, 성령에 의하여 진리 올바른 도를 보여준다. 그런고로 공회의는 신앙에 있어서 과오가 없이 보편적인 교회의 진리를 교황보다도 정확하게 충분히 체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회의는 교황 없이 소집되어, 교황에게 복종을 요구하며, 교황을 파면하는 것이 가능하다.
5. 공회의는 교회가 대분열, 퇴락, 부패에 빠지는 경우에는 교회를 통일하고, 개혁하는 의무와 책임을 가진다(@62).
1414년, 도이치황제 지기즈문도(???)의 권장으로 교황 요하네스 23세가 콘스탄츠 공회의를 열었다. 그 때 투표방법으로서 출석자의 인원수에 의하지 않고, 각 ‘국민’(natio)은 똑같이 한 표를 가진다는 생각 방법을 채용하여, 1415년에 공회의는 교령, ‘하엣구 . 산쿠타’에 있어서 공회의 수위설을 확인하였다(하나의 결정행위에 있어서 국민이 일괄적인 행위의 주체로 생각되어지게 된 것은 후대에 자각된 국민의식, 국민국가의 발전에 관련하여 주목을 받을 만한 것이다)(@63).
다음으로 1417년의 교령, ‘후레크엔즈’(???)에는 이후로는 공회의가 정기적으로 소집될 것으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공회의는 신 교황 ‘마르티누스’(???) 5세를 선출하여 교회의 대분열을 종식시키게 되었다(@63).
3.2 교회의 재통일
1417년에 교회의 재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자, 공회의 수위설은 교황 수위설에 비하여 존재가치가 희박하여 지게 되어, 후자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덧붙여 1431년에 개최된 바젤(???) 공회의는 이전의 공회의에 비하여 하급성직자의 세력이 강화되어, 반교황적인 결정이 많이 나타나고, 1439년에는 공회의 수위설에 집착하는 세력은 대립하여, 교황 훼릭스(???)5세를 선출하여 다시 교회의 분열을 야기 시켰다(@63).
많은 세속군주들은 자신들에게 라이벌인 로마교황에 대항하는 세력 사상으로서의 공회의 수위설을 이제까지 지지하여 온 것이지만, 이러한 종교적 혼란과 교회체제의 무질서가 자국 영토 내에서 정치적 사회적 질서에 동요를 가져올 것을 두려워하여, 공회의주의자들을 지지하지 않게 되었다(@63)
공회의 수위설에 대신하여 교황 수위설이 다시 주류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100년에 걸치는 교회체제의 혼란 및 교황권위와 세속 통치권력과의 사이의 투쟁은 이론과 실제의 양면으로부터 교회의 보편적인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것과 더불어 전 유럽에 있어서 종교의식의 통일은 서서히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세적인 세계, 즉 두 개의 보편적인 권위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질서와 정치적 질서의 두 가지가 하나가 된 Respublica Christiana(크리스트교 사회)의 (@63) 보편성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64).
다른 정치영역에 있어서도 국민의식의 형성과 국민국가를 향하여 유럽각지의 정치세력이 성장 발전을 개시하였다. 정치에 있어서 보편적인 권위의 근저가 무너지고, 정치적인 특수가 성장하였다. 중세의 종말의 시작이라는 것은 그러한 것이었다(@64).
3.3 공회의주의와 입헌주의
정치사상사에 있어서 피기스(Figgis), 라스키(Laski) 등에 의하여 이제까지의 정설로서 공회의주의사상이 세속정치영역에 있어서 입헌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되었다. 어쨌든 중세로부터 근대로 향하는, 시대의 전환기의 사상을 신학, 철학을 포함한 시점에서 공회의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의 사상상(思想像)을 하나하나 상세하게 연구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도이치인 신학자 교회행정가로서 유명한 니콜라우스 쿠사누스(Nicolaus Cusanus 1401-64)의 사상에 대하여서는 비교적 되어 있지만, 프랑스인 철학자, 피에르 다이이(Pierre d'Ailly, 1350-1420), 장 드 거슨(jean de Gerson, 1363-1429) 등의 사상연구는 앞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니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64).
  • 가격1,600
  • 페이지수26페이지
  • 등록일2009.12.14
  • 저작시기2008.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6726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