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근,현대사 2011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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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중국의 근.현대사의 의미
ㄱ. 기점
ㄴ. 근대의 시작
ㄷ. 근대를 채우는 주요내용
ㄹ. 현대로의 전환
ㅁ. 현대의 의미
ㅂ. 최근의 중국
2. 근,현대사의 변천
ㄱ. 아편전쟁
ㄴ. 태평천국
ㄷ. 양무운동 -반식민지화의심화
ㄹ. 중,일전쟁 -동아시아의 제국주의 성립
ㅁ. 무술정변
ㅂ. 신해혁명
ㅅ. 5.4 운동과 중국공산다의 성립
ㅇ. 북벌전쟁
ㅈ. 2차 국내 혁명전쟁
ㅊ. 항일전쟁
ㅌ. 해방전쟁
3. 당대 중국의 좌절과 극복
ㄱ. 신중국의 변화
ㄴ. 단계별 개관
4. 근,현,당대사에 걸친 갈등요소
별첨 - 년도 별로 아편전쟁부터 문화혁명까지

본문내용

을 받아 베이징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혁명운동으로서, 중국의 근대화의 시발점.
당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유럽 열강이 중국침략의 고삐를 늦추고 있을 때, 일본은 21개조 요구 등으로 중국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대전이 끝나자 독일에 대한 전승국인 일본·영국·프랑스·이탈리아·미국 등은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개최하고, 독일이 중국 산둥 성에 가지고 있던 권익을 일본에게 양보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에 분격한 베이징의 학생은 5월 4일 데모를 벌여 반대의 기세를 올렸다. 학생들 사이에는 이미 21개 조항 요구반대운동의 경험이 있었고, 이 5·4운동은 애국운동에 그치지 않고, 봉건주의에 반대하고 과학과 민주주의를 제창하는 문화운동의 요소를 띤 광범한 민중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이징의 군벌정부는 즉시 탄압에 나서서 30여 명을 체포하였다. 학생들은 스트라이크로써 대항하였는데 톈진(天津)·상하이(上海)·난징(南京)·우한(武漢)에까지 파급되어 민족 위기를 호소하고 국산품 장려, 일본 상품의 불매 등을 외쳤다. 6월 3일 군벌정부는 대규모 탄압을 감행하여 학생 약 1,000명을 체포하였다.
6월 3일의 이 사건은 광범한 민중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어, 6월 5일부터 상하이 기타 도시에서의 노동자의 파업, 상점의 폐쇄 등으로 나타났으며, 전국의 각계 단체의 연합인 통일전선조직이 성립되었다. 그러자 군벌정부도 파리평화회의의 조인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운동은 이후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중화민국탄생(1912년)
아시아 지역 최초로 공화제국가 건국
중화민국(中華民國)이 탄생했다. 하지만 각지의 군벌에 의한 내전이나 몽골, 티베트의 독립 운동 등으로 인해 중화민국 시대의 중국은 분열되었다.
국공내전(1930년)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인민해방전쟁으로도 불리는데 1927년 4월부터 1950년 5월까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간의 내전을 말한다. 1927년에서 1937년까지를 제1차 국공 내전, 1946년부터 1950년까지를 제2차 국공내전으로 부르며, 결국 공산당의 홍군(紅軍)의 승리로 끝났다. 전쟁의 결과로 본토에는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의 중화민국은 타이완으로 패주하여 쫓겨났다. 이러한 국민당의 패배는 심각한 부정부패와 대부분 농민 출신이라 민폐를 끼치지 않은 홍군의 도덕적인 모습 등에 기인한다. 레닌주의를 계승하여 농민을 혁명의 주체로 본 마오의 공산주의 혁명이론도 중국 공산당이 승리한 이유 중 하나이다.
1936년 시안 사건을 계기로 1937년부터 1946년 사이에는 일본제국과의 중일 전쟁 수행을 위해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의 휴전과 공동항일 전선이 이루어졌는데, 이 휴전 기간의 합작은 제2차 국공 합작이라고 부른다
중일 전쟁(1937년)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시작되어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이다.
중일 전쟁은 20세기 아시아에서의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었다.
1931년 이후로 두 나라 사이에 간헐적 교전이 있었으나, 전면전은 1937년 이후로 시작되었으며, 일본의 항복과 함께 1945년에 종료되었다. 전쟁은 수십년 간 계속되어 온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의 결과였으며, 이는 원료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을 정치·군사적으로 지배하려는 것이었다. 동시에, 중국의 민족주의와 민족자결주의의 대두가 전쟁을 불가피하게 했다. 1937년 이전에는 양쪽이 소규모, 지역적, 다양한 이유로 전투를 벌였다. 1931년에 일본이 만주 사변을 일으켰고, 그 연장에서 일어난 1937년의 노구교 사건으로 두 나라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중국 공산당집권(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일당 독재 정치로 통치하는 공산주의 정당이다. 1921년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반제국주의 등을 강령으로 설립되었으며,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과 싸워서 승리하였다. 약칭은 중공(中共)이다. 중국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의 이론, 《세가지 대표》 중요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침으로 삼으며, 공산주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고 총강령에서 밝히고 있다
대약진운동(1950년)
1950년대 말에 마오쩌둥의 농업정책과 그로 인한 군중운동을 말한다.
당시 마오쩌둥은 기계보다 인력에 의존하는 노동집약적인 산업화 방안을 내세웠는데, 모든 마을에 소형 용광로를 개발하여 새로운 대형공장 건설의 필요성을 대체하려 하였다. 대약진운동은 소련식 모델을 본뜬 산업화 정책의 실패로 일어난 반동운동으로, 1960년대 중·소관계를 악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무리한 정책추진으로 인해 오히려 많은 인민들이 굶어죽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결국 1960년 초 중국 정부는 대약진운동을 철회하고, 사유지와 농기구를 농민에게 되돌려주게 되었으며, 각종 공사조직도 폐지하게 되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는 당내의 분열을 초래해 1966년 초에 일어난 문화혁명의 초점이 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1965년)
대약진운동 실패로 권력의 기반이 흔들릴 것을 우려한 마오쩌둥의 주도로 1965년 가을부터 약 10여 년 동안 중국 사회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킨 대규모 운동이다.
톈안먼 사건(1989년)
(천안문 사건, 天安門事件)은 1989년 6월 4일, 후야오방의 사망을 계기로 톈안먼 광장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를 중국 정부가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다. 천안문 사태, 북경 대학살 사건 등으로도 불린다. 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300여 명, 부상자 7000여 명이 발생한 사건이다. 비공식 집계로는 5천여 명 사망, 3만여 명 부상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 후 중국 공안부에서는 1990년 7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 발생하였으며, 군인은 56명이 사망, 7,525명 가량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정식발표하였다.
참헌자료
중국현대사 - 공산당, 국가, 사회의 격동
마리-클레르 베르제르 지음, 박상수 옮김 / 심산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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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11.12
  • 저작시기2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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