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공자 철학][공자 정명사상][공자 정치사상][공자 개혁론][공자 禮(예)][공자와 군자][공자 평가]공자의 철학, 공자 정명사상, 공자 정치사상, 공자의 개혁론, 공자와 禮(예), 공자와 군자, 공자 평가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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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공자][공자 철학][공자 정명사상][공자 정치사상][공자 개혁론][공자 禮(예)][공자와 군자][공자 평가]공자의 철학, 공자 정명사상, 공자 정치사상, 공자의 개혁론, 공자와 禮(예), 공자와 군자, 공자 평가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공자의 철학

Ⅱ. 공자의 정명사상

Ⅲ. 공자의 정치사상

Ⅳ. 공자의 개혁론

Ⅴ. 공자와 禮(예)
1. 예의 작용
1) 지도작용
2) 절제작용
3) 일관작용
2. 예의 의미

Ⅵ. 공자와 군자

Ⅶ. 공자의 평가

참고문헌

본문내용

상실할 것이다. 예가 예인 까닭은 표면에 나타나는 화려한 꾸밈에 있지 않고 내면에 함축된 숭고한 정서에 있다. 공자가 오로지 형식적인 의례만을 숭상하지 않았다는 것은 여기에서 매우 명백하게 표시되어 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점에 대해서 말하겠다. 공자가 말한 예는 한 번 이루어져서 불변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진보적인 것이다.
“자장이 10대 후의 일을 알 수 있느냐 여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은나라는 하나라의 禮를 따랐으나 증감을 알 수 있으며, 주나라는 은나라의 禮를 따랐으나 증감을 알 수 있다. 만일 주나라를 이어 일어나는 나라가 있다면, 비록 1백 대 이후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위정23)
은나라와 주나라 2대는 하나라의 예와 은나라의 예를 따랐고 또 증감이 있었다는 공자의 말은 본래 단지 예가 사실상 변동하고 있음을 서술한 것일 뿐 예의 증감이 허락할 수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 ‘만일 주나라를 이어 일어나는 나라가 있다면, 비록 1백 대 이후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에서 암시하는 뜻은 사실 이미 예가 증감이 있을 수 있음을 허락하고 또 예는 변동될 수 있음을 허락하였다.
공자가 비록 예는 변동할 수 있음을 허용했지만 결코 예 전체가 모두 변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공자는 예 가운데는 변동할 수 있는 부분도 있고 변동할 수 있고 변동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고 주장한 것 같다. ‘만일 주나라를 이어 일어나는 나라가 있다면, 비록 1백 대 이후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한편으로 예가 증감할 수 있다고 허용하였지만 또 한편으로 증감하는 것들 가운데는 증감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공자가 앞에서처럼 한 말에서 우리는 공자의 마음속에는 예 가운데는 변동될 수 없는 부분이 있어서 만일 이 부분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곧 예가 될 수 없다는 견해가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 가운데 변동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미래를 추측할 때 1백 대 이후의 광경도 또한 어려움을 미리 알 수 있다.
Ⅵ. 공자와 군자
\"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고 명분과 자기의 자리를 지킬 것을 밝힌 말이 있다. 또 공자가 제에 있는 동안 옛날의 순(舜)임금의 음악 소(韶)에 도취했다는 기록도 있다.
주(周)나라 영왕(靈王) 20년(B.C 552)에 노(魯)나라 즉 현재의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노나라의 대부(大夫)로 무용(武勇)을 떨친 바 있는 숙량흘(叔梁紇)이며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이다.
따라서 공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삼환씨의 세력을 꺾고 노나라의 임금을 제자리에 올려놓으려고 애를 썼다. 한때는 공자의 노력이 성공하는 듯 보였다. 즉 공자의 제안에 동의한 숙손씨와 계손씨는 스스로 자기들의 성벽을 부수고 병력을 해산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맹손씨는 반격을 해왔고 마침내 공자를 내쫓고 말았다. 이에 공자의 정치적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마디로 군자는 이상적 인간상이다. 군자는 학식과 덕행을 겸해야 한다. 말보다도 행동을 앞세우는 실천가라야 한다. 그리고 나를 극복하고 절대적 실재인 예에 돌아가야 한다. 즉 \"극기복례(克己復禮)\"다. 그것은 바로 \"나를 죽이고라도 인을 이룩하는(殺身成仁)\" 것이다
<논어> 첫 말이 \"배우고 때로 익히니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시작된다. 공자가 말하는 학문은 지식 습득만을 뜻하지 않고 넓은 뜻으로 도덕적 수양까지를 포함했다.
공자는 학문의 역사성과 전통계승의 중대성 다시 나아가서는 후세에의 전수를 중요시했다. 맹자는 이러한 태도를 지(知)와 인(仁)을 겸한 것으로 바로 성(聖)에 통한다고 했다.
공자는 배우는 최고의 목표를 예(禮)에 두었다. 예는 오늘의 예의 의식과 같이 좁은 뜻이 아니다. 예의 본래의 뜻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하늘의 계시를 받아가지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자기를 수양하여 남을 다스리고 자기의 이기적 입장을 극복하여 천도나 진리에 복귀하는 것, 즉 수기치인(修己治人)하고 극기복례(克己復禮)할 수 있는 사람이 참다운 지성인인 <군자(君子)>이다.
Ⅶ. 공자의 평가
공자는 한 개인의 지적 자질과 업적에 의하여 인류의 역사에 깊은 영향을 준 소수의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공자는 후세에 마친 영향만큼이나 많은 전설과 일화가 그 이름을 아주 두텁게 감싸고 있는 까닭에 그에 대한 진실을 알기가 매우 어렵다. 진실의 왜곡과 수식은 두 가지의 전혀 다른 동기에서 발생한다. 한편으로는 독실한 추종자들이 공자를 추앙하고자 한 나머지 그에 대한 기록을 신성화 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자와 같은 혁명적인 사상가로 말미암아 자신의 이익에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이 그들이 다져놓은 특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왜곡시키고 거짓되게 기술한 것이다.
이러한 많은 난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빙성이 있는 자료를 토대로 공자의 진면목을 엿볼 수가 있다. 그에게는 일생을 통하여 거의 신비적, 기적적인 냄새가 없고, 따라서 그 향상의 도정에 있어서 하늘의 계시나 영감 따위에 의한 비약의 순간이 없었다. 결국 그는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일상생활에 충실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자기의 세계를 개척하여 넓혀갔다. 그리하여 어디까지나 현실에 입각하여 현세에서 이상을 구축하고, 그리고 그 이상이 초자연의 힘을 빌리는 일이 없이 인간 스스로의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서 실현 가능한 일임을 증명하려고 한 사림인 것이다. 공자의 사상이 현대에 그대로 재현될 수는 없을지라도 오랜 세월동안 불멸의 생명력을 가졌던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것은 현대의 찰나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을 탐닉하는 현대인에게 시사하여 주는 바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김학주 저(1997), 공자의 생애와 사상, 명문당
공자 지음, 김형찬 옮김(2005), 논어, 홍익출판사
안종수(1996), 공자의 학설, 이론과 실천
존 모로 지음, 김영명백승현 옮김(2000), 정치사상사, 을유문화사
채인후 지음, 천병돈 옮김(2000), 공자의 철학, 예문서원
h. g.크릴, 공자 인간과 신화, 지식산업사

키워드

공자,   공자철학,   정명사상,   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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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5.05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74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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