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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승만 대통령][이승만][대통령][이기붕][김구][장면]이승만 대통령의 성격, 이승만 대통령의 약력,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철학,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이승만 대통령과 백범 김구, 이승만 대통령과 장면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이승만 대통령의 성격
1. 대내적 배경
2. 정신적 배경

Ⅲ. 이승만 대통령의 약력

Ⅳ.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철학

Ⅴ.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Ⅵ. 이승만 대통령과 백범 김구

Ⅶ. 이승만 대통령과 장면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험한 신문통신라디오TV 등에서의 기자회견을 통한 외교적 물의도 전혀 없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장면의 도덕적 영향력을 인식할 수 있다.
둘째, 장면은 2차대전 후 분단국가의 빈곤한 신생국 외교관으로서 대미의존성이 너무 강했다는 평을 듣는다. 대미의존은 미국의 절대적인 수혜국으로서의 당시의 한국상황을 볼 때 당연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올리버에 의하면 장면은 미국 고문들에게 너무 의존적이었다는 것이다. 즉 장면이 입법의원 시절부터 제 2대 국무총리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사안에 대해 너무나 빈번히 미국 고문들에 의존했다는 것이다. 장면의 이 같은 대미의존성은 제 2 공화국 수반으로서의 총리 시절 대미대일 외교가 굴욕외교였다는 평가까지 받게 하였다.
그러나 장면의 전시대에는 대외의존이 장면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한국 모두에게 관련된 문제라는 것을 반성해야 한다. 장면은 초대 주미대사로 부임하면서 처음부터 미국무성을 출입하면서 무기원조 교섭을 줄기차게 벌여야 했고, 625 전쟁 중에는 미국 시민들을 향해 전재물자구호활동을 해야 했다. 그만큼 미국에 의존하지 않고는 국가의 존립이 어려운 형편이었다.
셋째, 이러한 그의 대외의존성은 안보외교면에 있어서 그의 리더십을 크게 훼손했다는 평을 받는다. 그의 안보에 관한 고식적 사고는 대미의존도의 심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한국의 안보를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했으며, 그에게서 자력국방 의지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장면은 대미 군사외교를 무기지원교섭에 한정했다. 이승만 정권하의 초대 주미대사, 제 2대 총리로서의 안보외교는 한계가 있었고, 또 그 당시는 전쟁중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대미 의존적 안보관은 당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제 2 공화국 수반으로서의 장면 안보외교의 결여는 그의 주미대사 시절 군원교섭외교와는 상이한 관점에서 논의되어야 하는데, 대체적으로 이를 혼동하는 경우가 빈번하므로 이에 대해서 장면 평가에서는 제 2대 국무총리 이전과 제 2 공화국 수반으로서의 위치를 구분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장면의 안보외교 리더십에 관한 문제는 제 2 공화국 시대에 국한된 문제이며, 이 정권하에서의 주미대사, 2대 총리로서 제기된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제 2 공화국에서의 과도한 대미의존성의 연원을 장면의 주미대사시절과 연관해서는 안 되며, 장면의 리더십 문제 역시 위와 같은 맥락에서 분석해야 한다.
실제적으로 장면의 UN총회 수석대표와 주미대사로서의 외교 리더십은 그가 미국 유학에서 맛본 민주주의적 사고와 대화 그것이었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인 장면은 소수인원의 대표단이나 주미대사관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조직적으로 항상 업무를 분담시킴으로써 외교업무의 효율성을 높였다. 따라서 장면의 외교 리더십은 지극히 민주주의적이어서 10명 내외의 소수집단(일시적 공식적 소집단인 UN총회 파견 대표단 및 공식적 집단인 주미 대사관)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았다.
넷째, 그의 시대의 외교는 덜레스적 냉전외교시대로 상징되는 시기였으며, 해방 후부터 반공의지를 투철하게 한 장면의 외교 역시 반공주의적 외교였다. 그의 반공외교는 덜레스와 같은 세계적인 반공지도자와의 교분을 두텁게 함으로써 제 3차 파리 유엔총회에서 외교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625 전쟁외교에서 한국 측의 주역으로 외교의 현장인 미국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끝으로 장면이 이승만의 훈령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고투한 것은 19세기 국왕처럼 군림하기를 원했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성하기 위해서보다는 한국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외교란 국익을 위해 국력과 군사력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외교관의 활동이라고 정의할 때, 우리는 장면이 국력과 군사력이 결여된 최악의 상태에서 오직 민족적 국익을 위해 외교의 제일선에서 고군분투했음을 인식할 수 있다. 그의 외교사상의 근저에는 민족주의가 크게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Ⅷ. 결론
2차대전의 전후처리과정이 하나로서 한반도가 분리되고, 분단된 한국의 현실에서, ‘모스코바 3상회의’, 미.소 공동위원회 등은 한국의 정치상항에 보다 개선된 여지를 제공키 위해 시도되었으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실패하였다.
이들은 모두 냉전체제 하는 국재정치적인 입장에서 시도, 결과된 것이었으며, 이를 둘러싸고 국내의 여러 정치노선도 대립과 수렴을 계속하였다. 국내에서는 신탁을 둘러싸고 정치노선은 분열되고, 이념적인 대립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대립과 분열은 좌우합작으로 진정되는가 하였으나 큰 성과 없이 진행되었고, 이런 과정에서 국제정치의 조류를 냉정히 간파해 낸 이승만의 단정노선이 등장함으로서 우익은 다시 김구의 통일정부노선과 이승만의 단독정부노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단정노선이 정착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미국 즉 미군정과의 끝없는 불화는 5.10 선거까지 계속되었고, 그가 귀국할 당시 국내에 이미 성립되어 있던 인민공화국세력과, 그가 귀국한 직후 귀국하였던 중경임시정부세력도 이후 그의 정치노선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다.
한편 냉전체제의 결과로 미국의 대한정책은 크게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즉 미행정부는 반공.반소 라는 새로운 정책에 임하게 되었으며, 이 정책은 한국에서 공산화의 방지를 위한 단독정부수립정책으로 선회, 표출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곧 미국의 이승만 노선지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끝까지 극우적인 이승만이 아닌 중간파인 김규식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김규식은 좌우합작·남북협상 등을 통한 전한국의 궁극적인 통일을 계속 주장하였으므로, 남한단독정부수립의 주역은 이승만에게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이승만은 광복 후 혼탁한 국내외정책 속에서 공산주의와 투쟁하며 국내세력을 규합하여 단독정부수립을 성취시켰다. 그의 단정수립은 미소세력균형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송두영(2011) - 건국대통령 이승만, 불과구름
유영익(2002) - 젊은 날의 이승만, 연세대학교출판부
유영익(2000) - 이승만 연구, 연세대학교출판부
유영익(1996) - 이승만의 삶과 꿈, 중앙M&B
이종구(2005) - 이승만, 글벗사
이정식(2002) -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청년시절, 동아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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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08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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