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죄의 회개
2. 영성의 회복
3. 교회의 부흥
2. 영성의 회복
3. 교회의 부흥
본문내용
컨대 성현, 문장, 임금, 대장, 벼슬, 농사, 장인, 장사, 부자 등─에서 소원을 성취하는 방법으로 하나님 안에서 나태하지 않은 성실한 삶을 고난을 감내하며 꾸준히 영위해갈 것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신앙양태는 현실적 세속적이면서도 가치 지향적이었다. 만일 길선주의 이 저작을 시대의 한 전형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면 당시의 신앙양태는 오늘날의 기복적인 번영신학을 좇는 양태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러한 점에 대해 앞으로 보다 많은 사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기도하는 내용에 대한 신학적 검토와 아울러 7-80년대에 유행하기 시작했던 성경공부가 초기 사경회의 전통을 이었는가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
3. 교회의 부흥
비슷한 어휘로서 새 삶을 뜻하는 ‘갱생’(Renewal), 신앙을 다시 점검하는 ‘부흥’(Revival), 영적으로 깨우치는 ‘각성’(Awakening)이 때에 따라 구별되어 또는 교차해서 사용되고 있다. 평양 대부흥운동은 기성 교인의 신앙 향상을 위한 ‘부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부흥”은 침체된 삶과 신앙을 회복하는 것으로 외면적인 요소보다 내면성이 더 강한 개념이며, 영적인 각성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부흥운동을 통해 교회는 외적ㆍ수적으로 부흥하였다. 교회당이 급속히 늘어나고 교인이나 교회가 경영하는 학교와 병원이 늘어났다. 통계를 보면 장로교회의 경우 1903년에 19,327명이었다가 1907년에 56,943명으로 늘어났고, 1911년에 140,470명이 되었다. 감리교회는 1903년에 8,694명에 불과했으나, 1907년에는 33,319명으로 증가하였다. 이 같이 급성장한 한 이유는 부흥운동이 교회들로 하여금 네비우스(Nevius) 선교정책─자립(自立), 자치(自治), 자전(自傳)의 원칙─을 더욱 확고히 구현시키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교인들은 교회당 건축 및 수리 비용 그리고 매서인의 임금을 자체 헌금으로 지불하였다.
부흥운동은 교인들의 전도열을 높였다. 교인들은 사경회 기간 중 오후에 주로 둘씩 짝을 지어 가가호호를 다니며 축호전도를 하였다. 하루의 생업을 전도를 위해 바치는 ‘날 연보’(Day Offering)의 전통도 시작되었다. 행정적인 면에서도 부흥운동의 결과로서 한국교회가 조직되고 발전하면서 선교사의 활동영역이 한국인에게로 이전되어갔다. 북감리교회는 1907년 미이미교회를 감리교회로 개명하고 남감리교회와 연합하여 신학교를 세우고 국내 선교회를 조직하였다. 1908년에는 한국인 감리교 연회가 탄생되었다. 장로교회도 1907년에 최초로 한국인 목사 7인이 장립되고 독노회(the Independent Presbytery of Korea)가 조직되었다.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이 선교란 것을 알고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한 데 이어 일본, 산동, 만주, 시베리아에까지 선교사업을 확대했다 성공회도 1908년에 전국을 4개 지역으로 나누는 조직을 개편하였다. 침례교회는 1906년에 대한기독교회라는 교단명을 정하고 만주 시베리아를 선교지로 결정하였다. 1907년에 선교활동을 시작한 성결교회도 1908년 경성성서학교를 설립하고 교세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1909년 대부흥운동의 열기가 줄어들자 스톡스(M. Stokes), 리드(W. Reid), 갬블(F. Gamble)을 비롯한 남감리교 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보다 계획적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키려하였다. 이에 “백만인을 그리스도에게”라는 구호와 더불어 백만인 구령운동(1909~1910)이 추진되었다. 이 운동은 선교사들의 준비와 신도들의 전도에도 불고하고 10만 명도 못 채우고 막을 내렸다. 부흥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다는 교훈과 복음화를 향한 의지는 이후 귀감이 되었다.
인간이 부흥을 바라고 준비할지라도 부흥을 일으킬 수는 없다. 인간적 준비의 첫 단계는 사도행전 2:37절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다음으로 회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대부흥을 대망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흥이 일어나기를 통감하는 이들이 함께 모여 기도해야 하고, 특히 부흥운동을 이끌 영적 체험을 한 카리스마적 존재가 나오며 무엇보다도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기원해야 한다. 교인수나 헌금액수 같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것이 처음부터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구령사업에 매진할 때 차선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외적인 부흥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부흥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3. 교회의 부흥
비슷한 어휘로서 새 삶을 뜻하는 ‘갱생’(Renewal), 신앙을 다시 점검하는 ‘부흥’(Revival), 영적으로 깨우치는 ‘각성’(Awakening)이 때에 따라 구별되어 또는 교차해서 사용되고 있다. 평양 대부흥운동은 기성 교인의 신앙 향상을 위한 ‘부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부흥”은 침체된 삶과 신앙을 회복하는 것으로 외면적인 요소보다 내면성이 더 강한 개념이며, 영적인 각성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부흥운동을 통해 교회는 외적ㆍ수적으로 부흥하였다. 교회당이 급속히 늘어나고 교인이나 교회가 경영하는 학교와 병원이 늘어났다. 통계를 보면 장로교회의 경우 1903년에 19,327명이었다가 1907년에 56,943명으로 늘어났고, 1911년에 140,470명이 되었다. 감리교회는 1903년에 8,694명에 불과했으나, 1907년에는 33,319명으로 증가하였다. 이 같이 급성장한 한 이유는 부흥운동이 교회들로 하여금 네비우스(Nevius) 선교정책─자립(自立), 자치(自治), 자전(自傳)의 원칙─을 더욱 확고히 구현시키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교인들은 교회당 건축 및 수리 비용 그리고 매서인의 임금을 자체 헌금으로 지불하였다.
부흥운동은 교인들의 전도열을 높였다. 교인들은 사경회 기간 중 오후에 주로 둘씩 짝을 지어 가가호호를 다니며 축호전도를 하였다. 하루의 생업을 전도를 위해 바치는 ‘날 연보’(Day Offering)의 전통도 시작되었다. 행정적인 면에서도 부흥운동의 결과로서 한국교회가 조직되고 발전하면서 선교사의 활동영역이 한국인에게로 이전되어갔다. 북감리교회는 1907년 미이미교회를 감리교회로 개명하고 남감리교회와 연합하여 신학교를 세우고 국내 선교회를 조직하였다. 1908년에는 한국인 감리교 연회가 탄생되었다. 장로교회도 1907년에 최초로 한국인 목사 7인이 장립되고 독노회(the Independent Presbytery of Korea)가 조직되었다.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이 선교란 것을 알고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한 데 이어 일본, 산동, 만주, 시베리아에까지 선교사업을 확대했다 성공회도 1908년에 전국을 4개 지역으로 나누는 조직을 개편하였다. 침례교회는 1906년에 대한기독교회라는 교단명을 정하고 만주 시베리아를 선교지로 결정하였다. 1907년에 선교활동을 시작한 성결교회도 1908년 경성성서학교를 설립하고 교세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1909년 대부흥운동의 열기가 줄어들자 스톡스(M. Stokes), 리드(W. Reid), 갬블(F. Gamble)을 비롯한 남감리교 선교사들이 주축이 되어 보다 계획적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키려하였다. 이에 “백만인을 그리스도에게”라는 구호와 더불어 백만인 구령운동(1909~1910)이 추진되었다. 이 운동은 선교사들의 준비와 신도들의 전도에도 불고하고 10만 명도 못 채우고 막을 내렸다. 부흥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다는 교훈과 복음화를 향한 의지는 이후 귀감이 되었다.
인간이 부흥을 바라고 준비할지라도 부흥을 일으킬 수는 없다. 인간적 준비의 첫 단계는 사도행전 2:37절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다음으로 회개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대부흥을 대망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흥이 일어나기를 통감하는 이들이 함께 모여 기도해야 하고, 특히 부흥운동을 이끌 영적 체험을 한 카리스마적 존재가 나오며 무엇보다도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기원해야 한다. 교인수나 헌금액수 같은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것이 처음부터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구령사업에 매진할 때 차선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외적인 부흥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부흥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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