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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졌다가 강화로 돌아왔고, 병자호란이 있었던 1636년에는 다시 교동(校洞)으로 옮겨졌다. 1637년에는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광해군은 폐위된 이후에도 19년을 더 살다가 1641년(인조 19) 7월 제주도에서 눈을 감았다.
광해군은 왕위 계승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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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은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
2)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씽크빅, 2004
3) http://100.naver.com/index.nhn
4)「연산군일기」,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5)「광해군일기」,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6) http://koreandb.k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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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광해군이 궁궐공사에 매달린 까닭
4. 공세적인 대명외교
5. 권력 16년, 춘몽 16년
1) 광해군의 폐위 - 서인, 인조반정을 일으키다.
2) 인조와 반정주체들의 고민
3)인조반정 이후의 대외정책
6. 광해군을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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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폐모살제는 폐륜으로 비췄기 때문이다. 또 잦은 토목공사로 인해 수많은 민가가 헐리고 막대한 비용이 드는 탓에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진 이유도 있었다.
Ⅲ. 결론
광해군은 폐위 된 이후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다 결국 16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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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로 이를 놔두기는 하였으나 도덕적으로 분명 폐륜인 일을 저지르면서 광해군의 고뇌는 심했으리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④반정이 일어나다-과연 반정인가?
결국 1623년의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폐위되고 강화 교동으로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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