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연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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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한국 근대 연극론의 전개과정

1. 머리말

2. 근대극의 출발과 비평의 정립

3. 프롤레타리아연극운동론

4. 극예술연구회의 신극운동론

5. 대중극의 활동과 이론 비평의 발전

6. 국민연극론

7. 결론

본문내용

'신파극과 신극의 결합'으로서 신연극의 개념을 설정하고, 서항석은 「신연극 20년의 소장」(『동아일보』, 1940.5)에서 신연극을 '신파와 신극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의 연극계에서는 서항석보다는 안영일의 개념으로서 '신연극'의 용어를 사용하는데, 바로 이러한 '신파극과 신극의 결합'은 새로운 시대를 향한 '신연극'이 되고 이것은 곧 일본이 의도하는 '국민연극'의 개념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신연극은 건전하고 명랑한 오락, 예술성과 대중성의 결합으로 규정되며, 바로 이러한 점에서 1940년대에 급속히 번성한 악극의 의미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1940년대 이후에는 그 전까지의 모든 연극론이 하나로 모여 '국민연극'의 개념과 그를 위한 창작 방법론에 봉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창작 방법론의 구체적 실천 방침 중의 하나가 '현대극장'의 조직(1941.3)이라고 할 수 있는데, 과거 극연과 동경학생예술좌 단원들이 그 중심이 되어 <흑룡강> 공연(1941.6)을 성사시키고, 그 역량이 다시 1942년 9월의 '국민극 경연대회'로 결집되고 있음을 본다. 이렇게 1940년대는 전대의 연극론의 성과가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목적의 공연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내력의 힘으로 해방직후의 민족연극의 성과가 가능하게 됨을 상기한다면, 1940년대 국민연극론은 역설적으로 한국연극론의 성숙을 위한 발효의 터전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7. 결론
한국의 연극운동은 계몽주의적 관점에서 출발하였다. 이는 개화기에서부터의 현상으로, 1920년대는 3·1 운동 이후 성장한 민중의식의 영향으로 연극의 문화운동·민족운동적 성격이 강화되면서 연극운동이 보다 활발히 전개된다. 이에 따라 연극비평 역시 연극운동론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다.
일본에서 연극을 배우고 돌아온 현철은 1920년대 초 이기세와의 논쟁을 통하여 기존의 신파극을 포함한 모든 연극적 전통을 부정하고, 서양의 근대극을 한국에 이식하고자 하는 신극운동'을 주창하게 된다. 이후부터 신극'은 근대극'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이때에 제기된 연극 전통 부정의 논리는 이후의 한국연극사에 있어서 신극'과 신파극'[흥행극]을 단절시키는 상호부정의 모순을 범하게 된다. 이후 김우 진과 홍해 성 등에 의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전개된 신극운동론'은 한국에서의 연극 문화를 수립하기 위한 관 객양성과 소극장운동 등으로 제기되는데, 이는 1931년의 극예술 연구회'의 조직으로 실현된다.
한편, 3·1운동 이후 성장한 학생 계층의 대두와, 1921년 극예술협회의 전국 순회공연의 영향으로 전국에서는 학생극을 중심으로 한 소인극운동이 활발해지게 되는데, 이 운동은 차츰 진보적인 색채를 띠면서 이후 프롤레타리아연극이 가능하게 되는 근거를 마련해 주게 된다. 이렇게 하여 1920년대의 계몽주의적 연극운동은 1930년대의 프롤레타리아연극과 극예술연구회의 연극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론은 1920년대 말에 대두된 계급주의 문화운동과 결부하여 일본의 좌익연극의 성과를 계승하면서 수용된다. 이 운동론은 1930년대에 들어서 실천적인 성과와 맞물리면서 볼셰비키적 대중화론으로 주창되고, 나름의 공연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이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은 종래의 연극과는 달리 이동적 소인극을 그 중심적인 공연 방법으로 삼아 운동을 전개하나, 객관적 정세의 악화와 주관적 역량의 부족으로 한계에 부딪치고 만다. 그러나 연극운동의 주체를 노동자·농민에게 둔 소 인극 또는 자립 연극의 성과는 해방 이후 활발하게 전개된 진보적 민족연극운동의 토양이 된다는 점에서 그 연극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극예술연구회는 1930년대의 신극운동'의 주체로서 한국연극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어 온 연극운동의 실체이다. 극예술연구회는 연구부에 해외문학파'의 문사들이 자리잡은 관계로 이들에 의해 논의가 전개되나, 이들은 연극전문인이 아니라서 그 논의는 공연 각본 해설에 머물고 말며, 또한 나름대로의 연극이론을 모색하지도 않는다. 이들은 한국의 연극 전통을 부정하고는 새로이 극문화를 수립하기 위하여 번역극 우선론을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나름대로의 방법론을 결여한 탓에 각계의 비난에 부딪친다. 즉, 일본 축지소극장의 공연 레퍼터리를 무리하게 직수입한 데서 비롯된 관객현실과의 괴리는 전반적인 극예술연구회의 운동 전체에 대한 비난으로 확대된다. 이에 따라, 유치진이 연출을 주로 맡게 되는 소위 제 2기의 시기부터는 창작극 중심론으로 운동 방향을 전환하면서 그 극복을 모색하게 된다. 극예술연구회는 이러한 운동 방침에 따라 다수의 극작가를 발굴해 내고, 일본에서 귀국한 연극인들의 활동 기반을 마련해 주는 등의 연극사적 의의를 획득할 수 있게 된다.
1910년대에 일본으로부터 이식된 신파 극'은 이후 변모를 거듭하여 1920년대 토 월회'의 연극으로 자리잡게 되고, 이후 1930년대에는 흥행극'이란 이름으로 통칭되면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 극예술연구회를 강하게 비판하는 흥행극계'는 뚜렷한 방법론이 없는 채 직업연극인으로서의 기술의 우위만을 내세우나, 이것은 결국 통속적 대중화의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못한다. 그러나 기존의 상업극에 반기를 든 소수의 연극인들에 의해 제기된, 신극'의 정신과 흥행극'의 기술을 결합시키고자 하는 중간극'의 시도는, 1930년대 후반의 연극계의 자기 모색이라는 점,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해방 직후의 민족연극의 수립을 위한 한 과제로서 다시금 제기된다는 점에서 그 연극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1940년대에는 신극과 흥행극의 결합이라는 '신연극'의 개념을 도입하면서 침체된 연극계를 극복하려고 시도하지만 신체제와 결부되어 구연극이 아닌 새로운 연극으로서 '국민연극'의 수립에 이용될 뿐이다. 이러한 국민연극의 수립에는 일제 당국의 회유와 협박 이전에 일부 연극인들의 자발적 선택이 자리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그러나 국민연극론은 당연히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으며, 악극과 같은 대중극의 번성을 조장함으로써 오히려 연극 기술의 발전이라는 부수적인 수확을 거두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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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7.06
  • 저작시기2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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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98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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