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통치하의 민족실력양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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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 론

2. `문화통치`

3. `문화통치`하의 민족실력양성운동
1) 물산장려운동의 전개
2)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전개

4. 결 론 - 민족실력양성운동의 성격과 한계

본문내용

總領大理」11월 22일 電文 暗 17762,『現代史資料』28, p. 304.;윤병석, 앞의 책, p. 197에서 재인용.)
독립군측의 전과는 이상과 같이 볼 때, 일제측의 전투 내지 정보 기록에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든지간에 독립군의 대첩은 분명한 것이고, 또한 그 전과는 자그마치 1천 명 이상 단위였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독립군측의 피해는 일본군측의 기록에서도 백운평 전투에서 겨우 16명의 전과를 올렸다는 것을 비롯하여 어랑촌 전투에서는 약 60명이고 이어 고동천 골짝 전투에서 사상자 30명이라고 하는 정도였다. 한편 독립군측도 경우에 따라서는 피해가 거의 없는 것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독립군이 배 이상의 병력에다 신예 무기를 갖춘 일본군과 교전함에 있어서 이처럼 작은 손실에 그쳤다고 보는 것은 어렵다. 게다가 상해임시정부의 파견원인 안정근(安定根)의 보고에는 10월 22일부터 3일간의 회전에서 3백 명의 사상자가 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다 22일 이전에 있은 백운평 전투와 25일과 26일의 고동천 골짜기 전투 등에서 발생한 사상자를 합치면 그 피해는 더 올라간 숫자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이와 같은 피해는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거둔 전과에 비하면 월등히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군이 청산리 전투에서 이와 같이 대승을 할 수 있었던 원인을 살펴보면, 북로군정서의 서일총재는「대한군정서보고」에서 우선 정신적측면에서 독립군이 조국을 위하여 굶주림을 견딜 뿐 아니라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 항전 의지를 가진 데 비해 일본군은 살아서 돌아가려는 의식이 충만하였고, 둘째 전술적 측면에서 독립군이 전투하기 유리한 진지를 선점하여 정확한 공격을 한 데 비하여 일본군은 삼림 계곡 등의 지형을 이용한 전술이 뒤떨어져 자상자전투(自傷自鬪戰)까지 전개했고, 셋째 독립군은 지휘관의 작전 지휘 능력면에서 일본군을 월등히 압도하여 그들의 계획과 작전을 모두 낭패시켜 맹공·대승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에 못지 않은 중요한 원인으로 간도 내지 연해주 한인사회의 헌신적인 지원을 들 수 있다. 청산리대첩 때 첫째, 독립군의 병참은 물론 모든 음식까지 그 지방의 한인이 자발적으로 제공하여 병참이 월등히 풍족한 일제 토벌군을 섬멸시킬 수 있었다. 이들은 백운평·완루구·천수평·어랑촌등지에서 극도의 굶주림 속에서도 격전을 벌이던 독립군에게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음식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둘째, 간도의 한인 사회는 조직적이며 효과적으로 독립군을 위한 정보 활동과 통신 연락을 제공하여 청산리 회전을 대첩으로 이끄는데 기여했다. 특히 10월 21일 새벽의 천수평전투는 그곳 농민의 정보에 의거하여 일본 기병대를 기습공격하여 승첩한 것이고, 같은 날의 완루구 전투도 그곳 한인의 일본군 동향에 대한 정보에 근거하여 독립군이 그들의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유인 작전을 써서 일본군끼리 자상자전투를 전개하게 하여 그들을 전멸한 것이었다. 이 밖에도 회전 지역 내의 한인들은 그들이 잘 아는 밀림장곡(密林長谷)의 지형과 지리를 독립군에게 안내하여 전투시 좋은 진지를 언제나 선점, 이용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에게는 역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허위정보를 제공하여 독립군의 작전을 도와 승리를 초래케 하였다. 예컨대 청산리 백운평 전투에서의 백운평 계곡의 유리한 전지 점령이 대표적이다.
요컨대 1920년 10월의 이도구 어랑촌과 청산리 원근의 심산장곡에서 김좌진이 지휘한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 휘하의 독립군 연합부대 2천명은 간도를 침입한 일제 토벌군 소속의 동정언(東正彦;아즈마) 소장 휘하 5천여 명의 동지대와 대소 10여회의 혈전을 전개하여 한국독립운동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 청산리대첩을 올렸다. 또한 그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1910년 일제에 의하여 나라를 잃은 한민족이 그에 굴하지 않고 간도를 비롯한 남·북만주와 노령 시베리아에서 그곳 한인 사회를 바탕으로 국내외의 민족적 역량을 합하여 국외 독립운동 기지를 설치하는 한편, 그곳에서 일제 침략군과 독립전쟁을 감행할 민족의 군대인 독립군 양성을 추진하여 온 '독립전쟁론'의 중요한 소산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이와 같은 청산리대첩은 3·1운동에서 보여준 한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계승하여 일제 침략군과 독립전쟁을 결행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민족적 자주독립 역량을 훌륭히 입증해 보이는 데 중요한 전통을 세운 것이기도 하다.
6.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만주지역에서는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전쟁이 활발히 수행되었다. 이같은 만주지역에서의 독립전쟁은 1910년대부터 각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여 산업을 진흥시키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이룬 결과이다.
3·1운동 이후 편성된 독립군들은 국내로 진입하여 일제의 통치기관을 습격·파괴하거나 일본군경과 싸우는 한편, 만주에서는 대표적으로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등을 치뤄 일본군으로부터 대승리를 거두어 만주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독립군들은 물론 재만한인 및 국내의 동포들에게까지도 독립전쟁을 통해 일제를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그 결과 자신감을 얻은 독립군들은 1920·1930년대에도 일본군에 대항하여 만주지역에서 계속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한민족독립운동사』4·12, 1993.
* 국사편찬위원회,『한국사』21, 탐구당, 1984.
*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독립군의 전투』, 민문고, 1995.
* 민족운동총서 편찬위원회,『독립군의 전투』, 횃불사, 1980.
* 박영석,『독립운동의 발자취』, 탐구당, 1990.
* 윤병석,『독립군사』, 지식산업사, 1990.
* 한국일보사 편저,『재발굴 한국독립운동사』Ⅰ, 한국일보사 출판국, 1987.
*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5, 1973.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찬부,『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0·18·25, 1991.
* 김창순·박성수 편,『한국독립전쟁사』, 삼광출판사, 1989.
* 독립유공자공훈록편찬위원회,『독립군과 만주·노령지역의 독립운동』, 국가보훈처, 1987.
* 임황주,「만주지역의 무장독립전쟁에 관한 연구」, 건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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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3.01.22
  • 저작시기2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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