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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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친일파의 민족사적 의미와 성격 및 범위

◎친일파의 문제가 거론되는 이유

◎친일파의 형성과정과 사상적 배경

◎친일파 문제에 대한 연구현황과 과제

◎친일파의 주요인물

◎한국내 친일단체들의 현주소

본문내용

결과 조선의 통감이 된 이토의 추천으로 의정부 참정대신이 되었다. 또 이토의 요청에 의해 통감부 농사과 촉탁 조중응을 법부대신으로, 일진회 고문 송병준을 농상공부대신으로 하고, 임선준을 내부대신, 이병무를 군부대신, 이재곤을 학부대신, 고영희를 탁지부대신으로 하는 내각을 조직했다. 그리고 곧이어 의정부를 내각부로 바꾸게 되자 이완용은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송병준: 이완용과 쌍벽을 이룬 친일매국노 제 1호
친일매국노로서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는 송병준은 탁월한 처세술과 풍채로 미천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의리의 협객인 양 자 부하였으나, 출세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은혜까지 저버리는 배신과 사기의 명수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기회주의자였다. 이러한 그의 성격은 출신과 성장 배경 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하겠다.
송병준은 한말에 현감, 군수 등을 역임하였고, 통감부가 설치된 후에는 통감부 권력을 등에 업고 농상공부대신, 내무대신 자리에 올랐다. 또한 합병 후에는 일본의 백작까지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출생과 성장배경 등은 베일에 가려져 있어 전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사전류에는 그의 행각과는 걸맞지 않게 단편적이고 소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최남선: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서 기초자
학자로서 최남선이 범한 가장 큰 죄과는 그가 단군을 연구하면서 일제의 '내선일체론'에 협력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1920년대의 단군 연구에 집약되며 그것의 백마는 <불함문화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불함문화론>이 일본과 조선의정신상의 장기전의 대비하여 국조신앙을 우리의 정신적 지주로 확립하려 했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단군 연구에 대해서만은 학문적 '양심선언'을 하고 있다. 한 사람의 역사학자로서 최대의 자존심이 걸린 자신의 평생업적에 관한 것이고 만일 이 부분이 무너진다고 했을때, 육당 최남선의 학문은 거의 무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이점에 대해 한치의 양보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과연 그가 주장한 대로 그의 단군연구는 순결하기만 했던 것일까.
-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99인1, 친일파99인 2>>, 출판사 돌베게, 1993,pp133~204
◎한국내 친일단체들의 현주소
한일 양국간의 끈끈한 유칙관계를 형성시킨 주역이 양국 상층부간의 인맥이라면 보조는 이들이 설립한 양국 친선단체들일 것이다. 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양국은 “과거 두 나라 사이의 석연치 않았던 역사들을 청산하고 선린우호를 다진다.”는 구실 아래 한일 의원연맹을 필두로 한일 협력위원회, 한일 민간합동경제위원회, 한일 친선협회 등을 발족시켰다.
한일 친선단체 중 가장 광범위한 조직을 가지고 비교적 활발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 단체가 한일 의원연맹이다. 이 단체는 당초 1972년 동경에서 한일 의원간친회라는 이름으로 발족, 75년에 한일 의원연맹으로 확대 개편됐고, 76년에 현 자민당 이외에도 공명당이 가입해 있으며, 사회당도 곧 정식 가입할 예정이다. 한국 측의 현 회장은 박태준 민자당 최고위원이며, 일본 측은 다케시타 전 총리.
민간외교를 통해 양국 정부간의 우호를 증진시킨다는 목표 아래 1969년 1월 출범한 한일 협력위원회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비교적 광범위한 분야에서 양국간에 선을 대놓고 있다. 특히 일본 측의 경우 과거 일본정계를 주름잡았던 인사와 현재 정계나 재계 실력자들도 많아 정부 차원에서 해결하기 힘든 현안문제들이 이 채널을 통해 해결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기시 전수상이 죽기 전까지 이 단체의 회장으로 있었으며, 세지마도 상무이사로 활동했었다. 한국 측 현 회장은 유창순 전 총리.
1968년 창설된 한일 민간합동경제위원회는 정경분리의 원칙을 내세우고 등장한 단체로 양국의 유수한 기업인들이 주축이 되어 양국 민간차원에서의 경제협력 강화를 목표로 출발했다. 해마다 동경과 서울을 번갈아가며 대규모 경제인회의를 가지는 정도일 뿐 특별히 정치적 활동은 미약한 편이다.
한일 친선협회는 일본 측의 일한 친선협회와 짝을 이루는 단체이다.
1961년 일본의 지방에서부터 창립되기 시작한 일한 친선협회는 77년 현재 전국 2개 현(縣)을 제외하고는 모두 결성되어 46개 지역에 지부를 가진, 소위 일본 전역에 걸친 일한 친선조직으로 성장했다.
이 단체와 더불어 일본에서 자생한 단체로 일한 친화회를 들 수 있다.
전전 일본의 수상을 지낸바 있는 스즈키 간타로의 아들로 초대 일본 출입국관리청 장관을 지낸 스즈키 하지메가 한일 양국간의 ‘새로운 역사의 전개’를 위해 1952년에 개인적으로 설립한 단체가 바로 이것이다. 이 단체는 일본의 역대 주한대사들을 이사로 위촉해 한일 문화교류에 역점을 두었으며, 월간으로『친화』라는 잡지도 발행했다. 지난 77년 이 단체를 해산하면서 스즈키 회장은 “한 20년 정도 걸려 한일 양국의 우호증진에 기여하려고 출발했는데 5년을 더 한 셈”이라고 했다.
70년대 들어서 이미 스즈키의 말대로 양국간의 우호는 적어도 겉으로는 상당히 호전되어 있었다.
이상에서 간단히 언급한 한일 친선단체들은 형식적인 차원에서 양국간에 유대를 강화시킨 반면 궁극적으로 양국 엘리트계층의 인맥형성에 기여했으며, 특히 양국간 정경유착에 결정적인 역할을 주도해왔다.
혹자는 친일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하기에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나 아까운 시대라고 말할지 모르나 이는 올바른 미래를 위한 역사의 청산이라는 차원에서 분명히 다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또 그래야만 한일 양국간의 정상적인 관계정립에도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진정한 화해와 우호는 상호이해 속에 잘못된 과거에 대한 청산과 용서 속에서만 비로소 싹을 틔울 수 있기 때문이다.
-김삼웅, 일본 신국가주의의 전개와 친일파의 부활, 학민사, 1992, pp203~205
※참고문헌
이영빈,『한국 근현대사와 친일파 문제』,아세아문화사, 2000
김삼웅,『친일파 그 인간과 논리』,학민사, 1990
반민족문제연구소,『친일파99인1』,『친일파99인2』, 출판사 돌베게, 1993
정운현,『일본 신국가주의의 전개와 친일파의 부활』, 학민사,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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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5.30
  • 저작시기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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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299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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