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경제 구조의 변화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조선후기 경제 구조의 변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생산력의 증대
1) 경제의 활성화
2) 농업 생산력의 발전
3) 지대의 변화
4) 민영 수공업의 발달
5) 광산의 개발

2. 시장권의 확대
1) 조선 후기 상업 활동의 주역
2) 장시의 발달
3) 포구에서의 상거래
4) 대외 무역
5) 화폐 보급

◆보충 자료◆

본문내용

할 공간이 더욱 커졌다. 나아가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불법적으로 광산을 채굴하는 '잠채(潛採)'가 확대되어 갔다. 수령 이상의 권력자와 손을 잡은, 지위와 능력이 있고 노동자들을 동원할 자본을 갖춘 토호나 대상인 등이 물주(物主)로서 은광을 경영하는 경우가 늘어갔던 것이다.
광산 채굴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라 상업이나 고리대금업을 크게 벌이던 자본가들이 금광 운영의 주체가 되는 양상은 점점 늘어갔다. 때로는 그들이 직접 나서서 일꾼들을 모으기도 했을 것이다.
금광의 비중이 커지는 중에, 사금광의 경우에도 용이하게 채취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야 했다. 광산 채굴의 오랜 경험을 가지고 그 지방의 사정에도 밝은 데다가 관청이나 상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능력이 있다면 경영의 일선에서 활동할 조건을 마련할 수 있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에는 그런 인물들이 혈주 또는 덕대가 되어 시설비용과 운영자금을 제공하는 물주를 업고 직접 광산을 경영하였다. 혈주와 덕대는 사업가로서의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경영에 실패하여 큰 불상사를 빗는 일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광산은 점차 자본주로서의 물주와 그 밑에 고용되어 임금을 받고 노동력을 파는 인물들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따. 광산에서 일하던 사람들에게서 나타난 다양한 변화들은 조선후기 경제 및 사회 구조의 전체적인 변화와 맞물려 있던 것으로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에는 결국 자본주의 경영의 형태를 성립시켰다고 설명되고 있다.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 pp. 182-185
조선시대에도 이런 일이!
도시문제의 발생과 도시정비사업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인구증가로 인해 도시화가 진전되면 가장 먼저 직면하게 되는 것은 주택문제와 도시빈민문제, 각종 환경문제이다. 18세기 서울도 예외없이 이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는 양반사대부들이 적당한 거처가 없는 경우에 양반신분을 무기로 평민의 집을 빼앗아 거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일컬어 '여가탈입(閭家奪入)'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명백한 범죄행위였다. 그런데 이에 대한 금지조처는 17세기 후반 숙종때에 이르러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정조 때인 18세기 후반에는 이러한 사태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만약 평민이 자기 집을 빼앗기게 되면 반드시 한성부나 형조에 소송을 제기하여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여가탈입'의 발생은 서울 내에서의 주택부족에서 기인하는 것이었고, '여가탈입'의 소멸 또한 평민들의 주택에 대한 권리의식의 성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서울로 상경한 이들은 자신들이 거주할 주택이 없었으므로 청계천 주변에 움막을 짓고 살아가는 자가 많았다. 집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들은 청계천 다리 밑에서 밤을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처지는 당연히 걸식하거나 또는 하루 벌어 하루 먹는 날품팔이 노동자 신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조정에서도 서울 도심에서 거지들이 한겨울에 얼어죽거나 굶어죽는 경우가 빈발하자, 이에 대한 구휼대책을 정례화했다. 정조 대에 이르면서 겨울철이 되면 반드시 효경교, 광통교 다리 밑의 거지떼들에게 깔고 덮고 잘 가마니와 옷가지를 지급하는 것을 관례로 삼게된 것이다.
한편 이처럼 서울에 인구가 증가하면, 이들이 겨울철을 보내기 위해 사용하는 연료인 땔감소비가 늘어나게 마련이다. 이는 곧 서울 주변의 산을 헐벗게 하였고, 그 결과 산의 토사들이 하천에 계속 퇴적되어 하천바닥이 높아져서 웬만한 비만 내려도 청계천이 범람하게 되는 피해를 초래했다. 특히 이 시기에는 외부로부터 유입된 인구들 상당수가 청계천변에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이들이 입는 피해는 연례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조는 청계천에 대한 대대적인 준설사업을 시행했다.
1760년(영조 36)에 시행된 준천사업은 서울이 수도로 자리잡은 이래 최대의 준설공사로서, 실로 서울의 면모를 대대적으로 혁신한 사업이었다. 이 사업을 계기로 청계천의 흐름이 곧아졌고, 청계천변에 무질서하게 지은 집들은 대부분 헐어내서 하천변이 정비되었다. 또한 당시 파낸 흙으로 지금 동대문 안쪽에 가산(假山)을 조성하여 풍수지리상으로 서울의 동쪽이 허한 측면을 보강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정조 때에는 서울과 수원을 잇는 신작로를 개설하는 등 동시화에 따른 서울의 도시정비사업을 국가차원에서 전개하기도 하였다.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1, pp. 21-24-
쉬어가는 곳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서로 열렬히 사랑해서 결혼하게 된 한 쌍의 연인이 있었다. 남자는 아파트를 한 체 미리 사 두었고, 여자는 아파트 규모에 맞을 만한 가구와 가전제품을 점찍어 두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자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하루 아침에 형편이 어렵게 되었다. 결혼을 한달여 앞둔 날, 남자가 눈물을 흘리며 여자의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혜원 씨, 사실 아파트는 내 것이 아니에요."
그러자 여자의 눈물에서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괜찮아요. 전 이제 그 집에 채울 살림살이를 하나도 준비할 수 없는 걸요."
그리하여 두 사람은 단칸 전세방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남자의 월급은 보통 사람들보다 적었지만 여자는 마냥 행복했다.
일년 뒤 여자의 아버지는 다행히 건강을 회복해 사업을 일으켰다. 그러자 여자는 조금씩 자신이 불행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크고 좋은 가구들을 얼마든지 살 수 있게 되었는데 남자에게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견혼 전에 남자가 자기를 속였던 사실이 떠올랐고,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자는 친정어머니에게 자신의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사실은 김 서방이 아무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제는 털어놓아야겠구나."
남편은 아무것도 해올 형편이 못 되는 신부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상할까 봐 차라리 아파트를 팔아 장인의 빚을 갚았고 매달 월급의 일부를 병원비로 썼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여자는 깊은 남편의 사랑에 행복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 박종길, 미래사-

키워드

  • 가격2,300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5.06.27
  • 저작시기2005.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04344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