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의 생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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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1. 서 론
2. 본 론
(1) 로마인의 식생활
(2) 로마인의 의생활
(3) 로마인의 주거생활
3. 결 론

본문내용

, 탐욕스러운 지주의 입장만 강화시켰다.
조잡한 신석기 시대의 촌락에서도 주택은 언제나 신체를 가리는 차폐물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가족들의 만남의 장소이고, 또 가정신의 집이며, 가족 생활의 터전이었다. 가정의 '화로'는 요리하는 데 쓰일 뿐만 아닐 종교 의식의 중심이었고,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도덕적 가치의 저장소였다. 그러나 키케로 같은 저술가들이 주택에 부여한 경건함이나 가족에 대한 감상적 가치는 오직 귀족들이 집에만 부여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남긴 명언이 있는데, "들의 짐승과 하늘의 새들도 그들의 구멍과 숨을 자리를 가지고 있는데, 이탈리아를 위해 싸우고 죽어가는 사람들은 햇볕과 공기의 혜택을 볼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정 로마에서는 햇볕과 공기까지도 부족했다. 기원전 2세기의 한 작품에서 유베날리스는 "저택의 치솟은 규모를 보라. 층 위에 층이 쌓여 10층까지 올라갔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일반 시민들의 주거 생활권 - 일조권이나 통풍권 - 들이 귀족들에 의해 크게 침해받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3. 결 론
지금까지 고대 로마인들의 의식주와 그 생활을 살펴보았다. 로마 문명은 모든 것이 그리스 문명에서부터 출발하였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 많은 부분을 그리스 문명에 바탕을 두고 있다. 로마인의 의식주 생활과 가정 생활에서 모두 예외 없이 그리스인들의 영향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스인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그 땅을 다스린 것은 로마인들 이었지만 그리스인들에게 문화적으로 지배당한 것은 오히려 정복자인 로마인들이었다. 그러나 로마인들 역시 활발한 정복활동을 통해 식민지에서 엄청난 부를 획득하고, 국력을 신장시킴에 따라 그 나름대로의 독자적이고 실용적이며 한편으로 극도로 사치스러운 문화를 발전 시켜나간다.
로마 사회는 지극히 불평등한 사회였다. 이것은 제국의 번영기 때 더욱 심화되는데 각종 의식주 생활에서 상류층들의 변화가 이 시기에 일어나고 이것과 일반 대중들의 차이가 점점 더 벌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로마의 전성기인 화려한 제정 시대의 주택을 살펴보면 귀족들은 넓은 공간에 통풍이 잘 되며 위생적인 개인 목욕탕과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고 더운 공기를 방바닥으로 보내어 방을 따뜻하게 하는 온돌 시설까지 갖춘 저택에서 살았다. 이것은 20세기 전까지 온대지방에서 건설된 어느 주택보다도 넓고 편안한 집이었다.
반면에 로마의 임대 주택은 난방 시설과 하수도, 화장실이 없고, 요리하기에도 부적절했다. 모든 시설물이 빈약했고, 고밀도 인구에 다층인데다 건물 자체가 매우 조악했으며 자주 발생하는 화재를 대비한 안전 출구조차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건물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바로 로마 제국의 핵심을 이루고 이었다. 세계를 정복했다고 자랑하는 로마 제국 주민들의 대다수가 이처럼 시끄럽고, 공기도 제대로 통하지 않으며 악취를 풍기고 전염병이 우글거리는 지역에서 인정머리 없는 지주에게 바가지 임대료를 지불하며 살았다. 또 매일 빈민층에게서 야유와 폭행을 당해 성질이 거칠고 잔인해진 지주들 역시 그들의 가중된 스트레스를 풀 탈출구를 원했고 무산 계급들은 무산 계급대로 오락이 필요했다. 결국 이러한 배경에 의해 로마에서는 검투사들의 격투로 대표되는 피의 오락들이 성행하게되고 '빵과 서커스의 정치'가 행해진다.
그러므로 소위 'Pax Romana'는 격심한 빈부 격차, 중소 농민층의 몰락, 빈민들의 로마시 집중, 노예제도의 위기 등 공화정 말기 이래 로마 사회가 안고 있었던 여러 가지 모순점들이 해결되어 이루어진 평화와 번영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러한 모순점들의 표출이 로마의 강력한 군사력과 교모한 행정에 의해 억제됨으로써 유지된 평화와 번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실패한 이래 그러한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려는 근본적인 대책은 마련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리스의 참주(僭主)들이 이미 선보인 바 있는 민중에 대한 '빵과 서커스'의 인기 정책이 판을 친다. 따라서, 로마가 최고의 절정기에 달했을 때, 그 로마의 영광 뒤에는 더 큰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로마인들의 생활 문화를 살펴본 바, 여전히 역사의 실질적인 하부 구조를 차지하는 대다수 민중들의 실생활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것은 매우 어려운 듯하다. 선사 시대 이래 역사란 문자와 기록 문화에 의존하는 것인데, 과거에는 소수 엘리트 계층이나 전문적 종교 계층, 특권 계급들에게만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고, 그들이 문자를 독점하였다. 그 때문에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기술 자료들은 거의 '엘리트 계층의, 엘리트 계층에 의한, 엘리트 계층을 위한' 역사 기록이 대부분이다.
자신이 소속된 계급에 대한 자부심과 배타적 우월감으로 가득 찬 엘리트 계층은 자신들의 기록을 남겼을 뿐, 대다수 민중들의 생활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도 그들의 기록은 자신들의 시각에서만 바라본 것이므로 계급적 편견과 오해가 많았다. 대중에 대한 엘리트 계층의 뿌리깊은 불신과 경멸감은 노동자들이 어느 정도 독자적인 하위 문화(sub-culture)를 만들어냈던 19세기 말엽까지도 계속 이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엘리트 계층(로마의 경우 귀족 계층)들만의 역사는 온전한 역사라고 할 수 없다. 로마는 황제 한사람 혹은 몇몇 귀족들만의 로마가 아니고, 약 100만 가량의 대중들이 함께하던 로마였던 것이다. 로마의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이러한 민중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생활상의 이해는 역사적 이해에 있어서 정치 변화, 사회적 구조, 갖가지 제도와 같은 것보다 실질적으로 인간의 본 모습을 알 수 있게 한다. 이것은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역사 행위자로서의 인간을 찾아 나아가는 것으로서 '인간의 역사'에 근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제롬 카르코피노, 『고대 로마의 일상생활: 제국전성기』 2003, 우물이 있는 집
김복래, 『서양 생활 문화사』 1999, 대한교과서
블랑쉬 페인, 『복식의 역사』 1988, 까치
김진웅 외, 『서양사의 이해』 1997, 학지사
민석홍 『西洋史槪論 』 1997, 삼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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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6.29
  • 저작시기20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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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05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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