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소악부-익재 이제헌의 소악부 11수
본 자료는 2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해당 자료는 2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2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고려시대 소악부-익재 이제헌의 소악부 11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고려시대 소악부

Ⅱ. 익재 소악부 11수

Ⅲ. 마치면서

본문내용

탐라요는 매우 비루하나 백성의 풍속을 보고 세태의 변화를 알 수 있다.
☞익재는 앞의 9편을 기록한 다음 급암에게 새로운 가사를 짓기를 권장하여 두편을 짓는다고 설명한 후 위의 수정사를 기록하고 있다.
수정사는 당시 불계의 파계상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탐라 민요로 사문들이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 못한 것을 방축이 무너져서 흙탕물에 잠기었다고 표현하였다.
耽羅謠
從敎壟麥倒離披 거꾸러진 보리 이삭
亦任丘麻生兩岐 가지 벌어진 삼대도 내버려둔 채로
滿載靑甕兼白米 질그릇과 하얀 쌀 가득 실어 올
北風船子望來時 북풍에서 오는 배만 기다리누나
♣관련기록
이 가요 다음에는 다음과 같은 해설이 있다.
탐라는 지방이 좁고 백성들이 가난하여 전라도 상인들이 질그릇과 미곡을 가져다 팔아 주었으나 그것도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관가 및 개인의 소와 말이 들에 깔려서 새로 개간하여 경작할 땅이 없다. 관원들의 왕래가 베틀의 북과 같이 빈번하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단함이 더할 뿐이다. 그러므로 자주 백성의 소동이 일어났다.
☞탐라요는 경작할 곳도 없는 협소한 지역에서 육지에서 오는 배만을 기다리며 어렵게 살아가는 탐라 백성의 생활상을 그린 가요이다.
Ⅲ. 마치면서
익재 소악부는 칠언절구 형식으로 우리말 노래의 개요를 옮겨놓았거나 어느 한 대목만을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 노래의 묘미를 살리는 데 충실할 수 없었던 것이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國子가 없었기 때문에 민중의 감정을 노래한 가요가 문자로 정착되지 못하고 구전되어 유행하다가 조선시대 유학자들에 의해 남녀상열지사, 사리부재 등과 같은 명분아래 무참히 난도질 당해 오늘날 고려 가요가 전하는 것이 적고 歌名만이 전해 아쉬움이 많았는데, 익재의 소악부가 대중가요의 가사 내용을 짐작하게 할 뿐만 아니라, 모두 민중의 가요로서 습속(習俗), 풍자(諷刺), 연모(戀慕)와 특권계급의 착취에서 오는 원분(怨憤)등의 다양한 내용의 가요이기 때문에 소악부를 통해서 고려사회 민중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
민족문화추진회(1979), 국역 익재집1, 민족문화추진회.
손종섭(1994), 옛 시정을 더듬어, 정신세계사.
이종찬(1993), 한국고전문학전집 10권,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임기중(1993), 고려가요의 문학사회학, 경운출판사.
임형택,고미숙(1997), 한국고전시가전, 창작과 비평사.
허경진(1987), 익제 이제현 시선, 평민사.

키워드

  • 가격1,200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6.09.07
  • 저작시기2006.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6324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 편집
  • 내용
  • 가격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