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화 이론>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제도화 이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근대 학교교육의 제도화

2. 이론적 시각의 유형
1) 제Ⅰ유형 : 기능이론
2) 제Ⅱ유형 : 갈등이론 및 지위경쟁이론
3) 제Ⅲ유형 : 문화제국주의 이론
4) 제Ⅳ유형 : 문화전파이론

3. 대안적 설명의 모색 : 제도화 이론

4. 교육제도의 사회적 기능 및 성격

5. 한국 근대교육의 형성과정과 성격
1) 개화기의 교육
2) 일제 식민지 통치기의 교육
3) 해방이후의 교육

본문내용

패로 청의 내정간섭, 통치 권력의 무력화와 제국주의 세력의 침투 등으로 국민교육제도의 확립으로까지 연결되지 못하였 다. 그 후 다시 한말의 마지막 시도는 본격화된 일제의 침략적 간섭과 개화파 정권의 취약성, 외세의존에 대한 민중의 반발, 인적물적 자원의 빈곤 등으로 인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좌절되고 말았다.
(2) 일제 식민지 통치기의 교육
1) 식민지 정책을 맞이하며 근대교육의 출발점은 왜곡 될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화란 말 그대로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하여 타민족을 강제로 지 배하려는 침략행위이기 때문이다.
2) 식민지 상황에서의 교육은 더 이상 귀속적 신분으로부터 해방된 개인의 자아실현과 민 족국가 건설이라는 근대사회의 핵심과제를 변증법적으로 해결하는 제도적 장치가 아니 다. 식민지 교육은 피지배민족의 집단적 정체성을 박탈함으로써 자주적 민족국가 형성을 방해하고 이들의 문화적정신적 예속상태에 묶어두고자 한다.
3) 구한말부터 1945년 해방까지 일제에 의하여 주도된 한국의 근대교육은 식민지 교육의 전형이었다.
- 한민족의 황국신민화를 식민지교육정책의 기본 골력으로 설정하였다.
- 1910년 한일합방 이후 4차에 걸친 조선교육령을 시행함으로써 한국어와 한국사를
말살하고 일본어와 일본식 문화를 보급함으로써 한반도를 영구히 그들의 지배하에 두
려는 획책을 하였다.
- 1906년부터 1945년 기간 동안 각 급 학교의 교육과정에서의 조선어와 일본어에 할당 된 주당 시간 수 및 전체 시간 수에 대한 비율을 통해 일제의 한민족 문화말살과 황국 신민화의 의도를 잘 볼 수 있다.
시기
조선어 및 한문
일본어
총 수업 시간 수
1906~1909
초등학교(1~4학년) 중등학교(1~4학년) 사범학교(1~3학년)
24(20.7)
16(21.7)
9(8.8)
24(20.7)
24(20.0)
12(11.8)
116
120
102
1911~1922
초등학교(1~4학년) 중등학교(1~5학년) 사범학교
22(20.8)
14(10.9)
-
40(37.7)
30(23.4)
-
106
128
-
1922~1938
초등학교(1~6학년) 중등학교(1~5학년) 사범학교(1~5학년)
20(12.2)
12(7.5)
9(6.2)
64(39.2)
32(20.0)
27(18.7)
163.5
160
144.5
1938~1943
초등학교(1~6학년) 중등학교(1~4학년) 사범학교(1~3학년)
16(8.8)
7(4.1)
7(4.6)
64(35.0)
30(17.3)
27(17.6)
183
173
153
1941~1945
초등학교(1~4학년) 중등학교(1~4학년) 사범학교(1~3학년)
0(0.0)
0(0.0)
0(0.0)
50(28.6)
20(13.3)
8(6.7)
175
150
120
<일제하 조선어 및 한문과 일본어에 할당된 주당 시간>
(괄호 안의 숫자는 주당 전체 수업 시간수에 대한 비율을 나타냄)
- 위에 표에서 보여지듯 조선에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고 식민지 침략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1906년부터 조선의 완전합병을 목표로 교육을 강화하였다.
- 식민지 교육 초기부터 조선어와 조선 문화의 말살을 기도함과 아울러 조선 역사나
지리에 대한 교육을 점차 일본 역사와 지리의 주입으로 대체하였다.
4) 일제 식민지 통치기간 동안의 한국교육은 제도적 외양만 근대적 형태일 뿐 내용상으로 는 철저하게 민족의 정체성 말살 및 수탈의 수단에 불과하였다. 결국 일제의 식민지 통 치기간동안의 한국교육은 근대적 개인의 형성을 통한 주체적인 민족국가 건설이나 국 민동원의 제도적 장치로서의 성격을 지니지 못했다. 근대교육의 제도화의 주체가 되어 야 할 독립된 국가를 가지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제 치하의 한국교육은 개인차원의 입신영달을 위한 수단으로서 제한된 의미를 지녔을 뿐, 국가나 민족차원의 공공사업으로서의 존립기반을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3) 해방이후의 교육
1)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한국의 근대교육이 명실상부한 근대국가건설의 초석으로 서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었던 절호의 계기였다. 하지만 극심한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본질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2) 1960~70년대의 급속한 공업화 및 도시화와 더불어 한국의 학교교육제도 역시 엄청난 양적 팽창을 거듭하였다.
- 1994년 초등학교에 재학중인 학생 수는 약 410 만 명으로 취학률 100.5%, 중등학교 약 251만 명 취학률 99%, 고등학교 약 206 만 명으로 취학률 88.7%에 달한다.
- 대학 역시 약 166 만 명 취학률 49.3% 유치원 50만 명(취학률 38.7%)
- 학생인구는 전체인구의 약 1/4에 해당하는 선진국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3) 하지만 외형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나라 교육제도는 지나친 학력주의, 과열 입 시경쟁, 학교 교육의 왜곡, 인성교육 상실 등 심각한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은 상당 부분 한국의 근대교육제도가 그 출발점부터 민족국가 건설 의 제도적 장치로서의 공적인 성격을 갖지 못하고 개인의 입신영달이나 정치적이데올 로기적 목적당성을 위한 수단으로 정착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4) 서구의 근대교육은 사회의 가치로운 공적 자산으로 인정되며 그에 따라 개인의 위계적 계층화와 보상의 준거로 정당화되었지만 우리나라의 근대교육제도는 일제에 의한 주권 박탈과 식민지 통치 그리고 연이은 민족의 분단으로 인하여 그 공적 존립기반으로서의 온전한 국민국가를 가질 수 없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근대교육은 출발점부터 입신출 세의 도구로서의 사적 차원의 의미만이 지나치게 부각되고, 민족국가 건설의 제도적 장 치로서의 공적 존립기반을 상실한 기형적인 형태로 왜곡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 우리나라 교육의 시급한 과제는 무엇보다 교육의 공공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내 자식 의 교육과 더불어 남의 자식의 교육을 함께 고려하는 타자 중심적교육열이 회복되 고, 개인의 제한 받지 않은 교육권과 더불어 교육받은 개인의 시민으로서의 책임을 동 시에 강조되는 선진교육문화의 확립을 통해서만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는 진정한 의미 의 근대성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 가격2,5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7.05.23
  • 저작시기2005.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1098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