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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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박형룡 박사의 생애
1) 박형룡 박사의 생애
2) 박형룡 박사의 생애의 환경
2. 박형룡의 사역
1) 변증학자로서
2) 목회자로서
3) 신학자로서

Ⅲ. 결론

본문내용

론 박형룡 박사는 이때 서로에게 하나로 묶여 한국교회의 개혁을 주장했으나 그 목소리는 그들의 분열을 저지 하지 못한 채 박형룡 박사의 고려신학교 사임이 총회의 고려파 공격의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② 1953년 두 번째 분열
박형룡이 만주 봉천에 머물러 있는 2년 동안 남한에서 유일한 총회 인준 신학교는 김재준이 이끄는 조선신학교였다. 김재준은 1946년 『새사람』11호에 “정통신학은 신신학보다 더 교묘하게 위장한 실제적 인본주의요 정통이단”이라고 비판하고, 선교사들에 대해서도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이며 “선교사의 집권시대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장동민, 『박형룡의 신학연구』, 265-266.
이러한 김재준의 조선신학교에 대한 교회의 우려는 많은 교회들로 하여금 박형룡의 귀국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사실 김재준의 성경관은 바르트주의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초자연적인 것을 부인한다든지 역사 속에 나타난 계시를 약화시킨다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박형룡은 “ 김재준 교수의 진술서에 나타난 성서관은 파괴적 고등비평의 성서관이요 교리문제에 대한 변명은 신신학의 교리관이다”라고 주장했다. Ibid., 364-376.
결국 53년 38차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를 파면하였고 조선신학교 파는 총회로부터 탈퇴하여 새로운 교단(기독교장로회)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③ 1959년 세 번째 분열
장로교의 세 번째 분열은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참여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먼저 그 당시 상황을 잠시 돌아가 살펴보면 총회 직영 신학교는 조선신학교였다. 그러나 1949년 박형룡과 보수주의지도자들은 사립 신학교의 총회 인준을 받아 총회 내 인준 신학교가 두 개가 되었다. 두 학교를 합동하려 시도하였으나 쉽지 않았고 51년 양 신학교 모두 폐쇄하게 된다. 그리고 51년에 대구에서 ‘총회신학교’로 개교하게 된다. 조선 신학교의 반발을 예상하여 감부열 선교사가 1대 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김재준이 파면 당하자 53년에 2대 교장으로 박형룡이 취임하게 된다. 50년대는 박형룡 박사의 전성기의 시대였다. 이 신학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신학교였고 교회와 해방 전 선교사들에게 박형룡은 한국의 신학자로써 인정과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한국에 온 선교사들에게 박형룡은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이고 배타적인 인물’로 인식되었다. Ibid., 370-376. 54년 10월에서 55년 4월 6개월 동안 박형룡은 미국장로교회 선교부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아 세계 신학교들을 돌아보기 위해 세계를 일주한다. 미국 장로교에서 이 여행을 주선한 까닭은 ‘박 박사의 신학이 우물 안에 개구리 같이 폐쇄적이며 자본주의에 물들어 있기에 세계 신학, 현대신학에 접촉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많은 선교사들은 그가 교장에 취임할 때 여러 가지 우려를 하였고 결국 그 우려는 58년 3천만 환의 불법전용사건 남산에 신학교를 새로 세우기 위한 대지를 불하받는 과정에서 3천만 환을 사기 당한 사건이 터져 나온다. 이 당시 거금을 이사회 승인도 거치지 않고 단독 결재하여 처리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로 인해 박형룡은 교장에서 사퇴하게 된다.
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WCC가입문제가 대두되었다. 총회 내에서도 찬성파와 반대파가 나뉘어져 있었는데 처음 박형룡은 온건한 반대 입장이었다. 그러나 3천만 환의 사건이 터지면서 그이 입지가 작아지고 교장직에서 물러나면서 입장이 더욱 강경하게 돌변하게 된다. 그전에는 WCC문제를 논할 때의 쟁점은 신신학과 단일교회가 쟁점이었으나 이후에는 용공(容共)주의 공산주의의 주장을 받아들이거나 그 정책에 동조하는 일.
가 더하여 져서 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이 공산주의에 많은 이득을 주고 있다면서 당시 정치적 반공사상까지 교회로 가져 들어온 것이다. 결국 양측은 서로 공방과 비방을 심화하다가 44차 총회를 끝으로 세 번째 분열을 하게 된다. 박형룡이 처음부터 WCC의 반대 입장에 선 것에는 그와 칼 매킨타이어와의 관계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장동민, 『박형룡의 신학연구』, 377-388. 칼 매킨타이어는 미국의 대표적인 근본주의(ICCC)의 리더이다. 박형룡은 그의 신학적 입장에 동의하였으며 총회신학교가 총회의 재정적 도움을 입지 못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기간 동안에는 도움을 입기도 했다.
Ⅲ. 결론
앞에서 잠시 살펴 본대로 박형룡 박사의 삶이 한국교회에 끼친 가장 중요하고 긍정적인 발자취는 신학적 중심의 확립이었다. 그는 일본강점기 시대에 신사참배의 문제에서 교회의 갈등 앞에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임을 분명히 알려주었다. 물론 그가 삶으로 그것을 지켜내 보여주지 못하였다고 하지만 신학자로써 성경의 바른 가르침은 그 시대 교회의 중심잡기에 도움이 되었다. 또한 김재준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주의의 물결이 한국에서 시작되어 성경의 권위에 대한 도전 앞에서도 그는 분명하게 성경의 권위와 보수주의 신학에 대한 확고한 가르침을 한국교회에 알려주었다. 그는 신학자로써 한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밑그림을 형성하는데 크고 중요하고 바른 영향을 끼쳐주었다. 그것이 그를 지금까지 존경하고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확신과 사명은 한국교회가 분리되는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하게 하는 부분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흔적의 아름다운 부분은 우리 속에 계승되고 부족한 부분은 더 낫고 성숙한 모습으로 우리 속에 계승되길 소망해 본다.
Ⅳ.『참고문헌』
박용규 외.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1996.
장동민. 『박형룡의 신학연구』. 서울: 한국기독교 역사연구소, 1998.
김영재. 『한국교회사』. 서울: 도서출판 이레서원, 2004.
양낙흥. 『한국장로교회사』.서울: 생명의말씀사, 2008.
박세환. “죽산 박형룡 목사의 설교에 대한 연구”.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최병천. “1930-50년대 장로교 신학논쟁(김재준, 박형룡의 성서관을 중심으로)”.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박형룡. “한국 장로교교회의 신학적 전통”. 『신학지남』. 제43권 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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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1.20
  • 저작시기20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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