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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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유로 조선 체육회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 7월 23일 ‘건민(健民)’과 ‘저항’을 이념으로 창립하였다. 조선체육회는 1920년 11월 4일 전국체육대회의 기점인 제1회 전조선 야구대회를 연 이후 종목별 전국대회를 주최하다가 1934년 종목별 경기대회를 통합하여 전조선 종합경기대회를 열었다. Daum 백과사전 - 대한체육회
이로부터 체육계는 비로소 조직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는 한편, 점차 우리체육의 탁월성을 나타내었다. 體育基礎理論 1996, 螢雪出版社, 孫錫正 外
이 시기에 결성된 경기단체는 조선체육회 뿐만이 아니라 조선궁술연구회, 조선정구협회, 조선야구협회, 조선농구협회, 조선축구심판협회 등의 여러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2)관서체육회
(3) 청년회의 체육활동
= 책 내용
4) 운동경기를 통한 저항과 제압
= = 프로레스링과 역도산
역도산은 원래 일본의 스모선수였는데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스모계의 최고 권위인 요코
즈나 챔피언자리에 오를 수 없게되자 스스로 프로레스링에 입문했다.
이후 일본 선수와 미국 선수의 프로레슬링 시합에서 일본 선수가 사정없이 얻어맞자 수많은 일본인 관중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으FEo 역도산 선수가 링안으로 난입하여 미국 선수를 사정없이 공격한다. 이때 역도산 선수의 사정없는 공격은 미국에게 전쟁에서 패한 것에 대한 일본인들의 한을 풀어주기에 충분했었고 이에 수많은 일본인들이 존경을 하게 된다.
역도산은 일본과 우리나라에 프로레스링의 인기를 얻게해준 주역이였다.
그리고 일부는 지금까지도 역도산이 일본인인줄 알고 있으나 역도산은 순수한 한국인으로써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마라톤과 손기정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종목 손기정선수 우승.
손기정선수는 금메달시상을하며 가슴에있는 일장기를 가리며 눈물을 흘렸다.
가라데와 최배달
최배달이라 불렸던 최영의는 일제시대 일본으로 건너가 가라데를 배워 무도가의 길을 걸었으며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여 ‘오오야마 마쓰다츠’로 개명하였다.
‘오오야마 마쓰다츠’의 한자 大山倍達(대산배달)에서 성인 대산을을 빼고 원래 한국 성씨인 최를 붙여서 최배달 이라고 불렸다.
최영의는 가라데의 극의를 경험하고 가라데의 한 유파인 극진 가라데를 창시하였으며 당시 초창기였던 국제 이종 격투 시합에나가 세계적인 여러 무도가들과 격투를 해서 승리를 거뒀다. 이로 인해 가라데가 일본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3. 체육 스포츠의 탄압.
=1938년 7월 4일 조선체육회를 일본인 단체인 조선체육협회에 강제로 통합시키는 한편 모든 체육을 국방 경기 화시킴으로써 우리 체육계는 일대 수난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2년 2월 14일 조선 체육진흥회라는 체육기관을 발족시키고 국가사업이라는 미명 아래 스포츠를 완전 통제 하에 두고 소위 국방경기라는 것을 등장시켰다. 종래의 현대 경기대회는 모두 중단되고 전력강화운동이나 전력경이 따위의 전쟁에 필요한 종목만을 강제로 실시하여 스포츠 계는 그야말로 암흑의 시대를 이루었다. 體育基礎理論 1996, 螢雪出版社, 孫錫正 外
이 시기에는 체육대회를 개최하기도 어려웠지만 개최한다 하더라도 개최 시에는 궁성가요(기미가요), 일본가요가 불리워졌다. 또한 이 때에는 체육용어도 일본어로 다 바꾸어 사용하도록 되었다. 이 외의 각종체육활동이 통제되었는데 개최일수는 1년에 한번으로 통제 당하였고 총독부의 학무국의 주최를 원칙으로 하여 일본인인 교장의 승인을 반드시 받아야 했다. 사실상 체육대회의 개최가 매우 어려웠던 상황 이었던 것이다.
(2) 일장기 말소 의거
=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을 제패하던 1936년은 일제가 조선민족의 얼과 뿌리를 송두리째 뿌리 뽑으려던 결정기 였다. 내선일체 신사참배 일본어 상용 창씨개명 등이 바로 그 좋은 예였다. 이에 맞선 조선민중의 항일의식도 활시위만큼이나 팽팽하게 부풀어올랐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운동경기는 바로 이러한 양 극점의 접점이라 할 수 있었다. 조선민중들은 축구 농구 역도 마라톤 등 일본인과의 각종 운동경기에서 일본인들을 통쾌하게 이김으로써 심리적 보상과 함께 민족의식을 드높이려 했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은 식민지 지배정책에 대한 정면 대결한 것이다. 30년대 후반의 항일 민족투쟁에 불을 지폈다고 할 수 있다. 손기정은 훗날 일장기말소를 주동한 이길용기자를 "그분은 신문 기자라기 보다 독립지사 같은 인물이었다"고 회고 했다.
이길용 기자의 3남인 이태영씨도 "한국독립투쟁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이 의거는 결코 한두명 기자의 개인적인 정의감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며 이심전심으로 이뤄진 언론인 모두의 항쟁" 이라고 했다.
사회학자인 신용하 박사는 "올림픽 우승의 영광을 일본이 아닌 한국민족의 것으로 확인하기 위한 용감한 언론의 대표적인 투쟁"이라고 말했다. 손기정은 당시 베를린으로부터 귀국하는 도중 싱가포르에서 이 사건을 듣고 "나의 심경을 묵시적으로 대신 표현해준 그 분들게 감사하고 그 분들이 고초를 겪고 있어 죄송한 마음이었다"고 술회한바 있다.
1936년 12월에 작성된 당시 일제의 정부문서 '쇼와 11년 집무보고' 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확인되고 있다. 극비로 분류된 이 문서의 '조선민족이 마라톤 우승선수로 인해 받은 충동' 이라는 항목에서 "손, 남 두 선수의 승리가 조선민족의 민족적 각성과 단결을 부추겨 무시할 수 없는 사태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동아일보 사설에서 두 용사의 우승이 조선의 피를 끊게 했고 한 번 일어서면 세계도 손안의 것이라는 신념과 기백을 가지게 했다. 또한 동아일보는 손선수 유니폼의 일장마크를 고의로 말살한 사진을 게재했다. 이로써 조선이 일본에 승리, 조선독립의 기초가 이루어 진 듯이 생각하는 경향이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고 기술했다.
손기정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사진은 1936년 8월 25일 오후 3시 동아일보 2판부터 실렸다. 동아일보는 즉각 무기정간 되었다. 또한 현재 여성동아 전신인 '신가정'은 일장기를 피하기 위해 손기정의 다리 부분 사진만을 싣고 "이것이 베를린마라톤 우승자, 위대한 우리의 아들 손기정의 다리'라는 설명을 붙인 것이 발각되어 '신동아'와 함께 폐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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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5페이지
  • 등록일2009.12.01
  • 저작시기2009.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62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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