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과 최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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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최제우와 동학사상
 1. 최제우의 생애
  1) 최제우는 누구인가?
  2) 생애
  3) 깨달음을 얻기까지
  4) 동학 창도의 배경
 2. 동학사상의 내용과 그 전개
  1) 동학은 무엇인가?
  2) 시천주(侍天主) 사상
  3)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
  4) 동학의 포교
  5) 동학의 의의

Ⅱ. 동학사상을 중심으로 본 한국의 민족주의
 1. 한국 민족주의의 특성
  1) 민족주의의 사전적 의미
  2) 민족주의와 국가의 관계
  3) 우리나라의 민족주의
 2. 여러 시각에서 본 동학의 민족주의
  1) 종교적 시각
  2) 정치적 시각
  3) 사회적 시각


<참고문헌>

본문내용

터 온 천주교의 광범위한 유포를 우리민족 고유의 전통적 신앙인 한울림 신앙으로 극복하려고 하였다. 또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시천주의적·인본주의적 가르침으로 조선민중들을 깨우치게 하였다. 그것은 절대군주 체제하에서 매몰된 개인의 인격적 가치에 대한 자각을 가져왔으며 당시의 학정, 압제 하에 있던 조선민중들의 정서와 들어맞아 혁명 발발에 상승작용을 하였다. 특히 동학은 “천국은 인간이 죽은 후 하늘나라에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건설해야 한다.”는 지상천국을 주장하였다. 동학의 평등사상, 휴머니즘, 개벽사상 등은 당시 양반 신분들로부터 차별과 학대를 받고 있던 민중들에게 복음처럼 들리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으며, 세력화된 농민을 결속시키는 일종의 사상적 운동으로 변모되어 민족의식으로 점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해몽 전봉준에 의해 주도된 동학혁명의 독립변수는 바로 동학이라는 종교다. 이전에 수차례 민란이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동학이라는 종교의 등장이 그것을 혁명운동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학의 인내천 사상, 지상천국 사상은 정치조직이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그 시대의 과제를 스스로 맡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 종교적 힘만으로는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에 한계가 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족주의의 최고봉으로서의 진가는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2) 정치적 시각
세계 역사에서는 물론, 우리 민족사에서도 역사의 고비마다 민중의 외침이 있었다. 그런데 순수한 민중의 힘으로 나라를 구하고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으려 한 항거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다. 안으로는 부패한 정부에 항거, 밖으로는 일본의 침략에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즉 이 동학농민혁명은 민중의 저항권을 부르짖은 민중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인 것이다. 결국 동학농민혁명과 그에 깃든 민족주의는 동학 발생시점(1860)에서부터 혁명 발발(1894)까지의 국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에 민족의 저력을 내외에 과시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고, 거기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할 당시, 서학(천주교)에 대립된 표현으로 동학이라 명한 것은 동학이 창설된 곳이 바로 동방의 나라인 조선임을 의미하여 조선 백성의 종교라는 민족적 입장에서 민중을 끌어안으려 함에 그 이유를 두고 있다. 당시 민중은 안으로는 사회적 불안과 외세(천주교 등)의 전래에 대해 경계하였고, 밖에서는 중국이 영·불 연합군에 패배하는 일이 일어나 불안과 근심이 날로 증폭되어가는 실정이었다. 즉 이런 시기에 최제우가 서양의 침입에 대하여 보국안민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제시한 것이 바로 동학이다. 동학은 보국안민이라는 대내외적 정치적 깃발을 내걸고 열강의 천주교 포교와 무력침입에 대항하였다. 그러면서 봉건체제 하에서 억압받던 민중을 한데 모아 그들이 가야 할 이정표를 제시하였으며 바로 여기에 그 정치적 의의가 있는 것이다.
3) 사회적 시각
본래 동학은 우리 민족이 큰 사회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 그 사회적 모순을 타개하기 위해서, 그리고 밀려드는 서구문명에 대항하기 위하여 자생적으로 일어난 민족주의적이고 종교적인 정신운동이었다. 그러나 교조 최제우가 혹세무민이라는 죄목으로 사형 당하자, 초기의 순수한 종교운동은 점차 흐려졌다. 이후에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는 교도들의 요청에 의해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자는 강력한 사회개혁운동으로 전환했고, 서구세력의 침투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민족주의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내외적으로 위기에 봉착한 당시의 조선 사회에서 민중의 힘으로 사회적 모순인 계급사회를 타파하고 독립국가를 만들어서 외세의 침략을 막아 민족의 자주 자립과 번영을 추구하려 한 것은, 동학이 당시의 위정척사 세력 및 개화세력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민권투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을 안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선 말 당시의 사회상은 온갖 부정부패가 만연하였고 대신들 중에서 일본에 국권을 파는 자들까지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조선의 멸망이 다가오자 점차 도참사상이 만연하였고 궁중에까지 무당이 출입하여 관직을 얻는 경우도 생겼다. 이렇게 도참사상은 그 당시에 위로부터 일반 백성들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되었다. 또 탄압받던 천주교 역시 꾸준히 교세를 확대하여 중인, 상민, 부녀자들에게 파고들어갔으며, 이는 주자학적 질서에 안주하던 지배층과 유생들을 불안케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모순과 배경을 등에 업고서 창도된 것이 바로 동학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회상은 무엇이며, 왜 그것이 단순한 민란의 성격을 띤 폭동이 아닌 사회적 개혁을 위한 혁명이었던 것일까. 19세기 초부터 천주교의 본격적인 포교로 계급사회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연암 박지원과 다산 정약용 등의 실학파들을 주축으로 유교 교리를 탈피하고 인간이성의 해방과 경세치용의 실리를 찾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실학파들은 봉건적 지벌과 문벌에 반대했으며 능력이 있으면 누구라도 벼슬길에 오를 수 있고 무능하면 양반이라도 하인이 되는 것이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즉 동학혁명 발생 이전부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인구의 증가에 동반하여 화폐제도가 발달, 산업사회로 진입하면서 상업적 부를 축적한 중산층이 대두하기 시작하여 계층 간의 부를 매개로 하는 신분적 변화가 더 크게 나타났다. 이리하여 양반의 절대적 권위는 점차 무너져갔고 서민대중의 반 양반적 의식이 강해지면서 1811년 홍경래의 난을 시발점으로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회상과 신분층의 지각변동으로 인해 조선 민중들은 자연스럽게 동학으로 연결되어 동학의 평등사상에 매료되었다. 기존의 민란은 새로운 양상으로 변모하고 발전되어 저항적인 민족주의의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동학의 전파와 동학농민혁명의 발발로 인해 계급적 신분제도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적 요인은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 같은 종교적 요인, 국내정치 불안과 외세의 침략이라는 정치적 요인과 함께 동학혁명의 3대 요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김해영, 한국사상강의, 승영철학사상연구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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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11.15
  • 저작시기2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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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75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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