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사회경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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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사회경제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조선 초 사회사
1) 토지제도
2) 납세제도
3) 가족제도
4) 신분제도
5) 병역제도
3. 조선 초 경제사
1) 농업 및 광공업
2) 외국과의 무역 및 상업
3) 화폐
4. 맺음말

본문내용

리, 잡학인, 신량역천인, 노비 등이 배속되었다.
교통과 통신체계도 전보다 한층 강화되었다. 군사적인 위급사태를 알리기 위한 봉수제(烽燧制)가 정비되고, 물자수송과 통신전달을 위한 역마참(役馬站) 제도가 전국적으로 짜여 국방과 중앙집권적 행정운영이 한층 용이해졌다.
조선 초기에는 취각령(吹角令)이라 하여 서울의 관료들을 수시로 궁 앞에 비상소집했으며, 무장한 갑사(甲士)들과 돌팔매의 전문가인 척석군(擲石軍)이 광화문 앞에서 서로 싸우게 하여 군사 훈련을 시키기도 하였다. 이 훈련은 사상자가 많이 생겨 중단되고, 민간의 민속놀이로 전승되어 갔다.
3. 조선 초 경제사
1) 농업 및 광공업
조선은 농업을 국가적으로 장려하였다. 국가에서는 농사 기술을 널리 보급하였으며 또한 농업 관련 서적도 인쇄하였다. 조선 이전의 시기에는 벼에 씨를 직접 뿌리는 직파법이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수리시설의 정비 등으로 모내기법이 확대되어 오늘날 벼를 심을 때는 모내기법만 쓰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그 전 시기를 통하여서 공업의 발달이란 거의 없었으며, 또 대개는 농업에서 분업되지 못하고, 농촌사회의 가내부업(家內副業)으로서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수공업이 행하여지는 정도였다.
농민은 토지의 경작과 동시에 일용품의 원료도 함께 장만하여 옷감을 짜거나 가구와 농기구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농민의 수공업 이외에 전문적인 수공업자를 공장이라 하였는데, 경공장과 외공장으로 크게 구분되었다. 중앙의 각 관청에 속해 있는 공장을 경공장, 지방의 각 도·읍에 소속된 공장을 외공장이라 하여 그 인원과 종류는 상당히 많았으나 이것이 근대적인 생산 체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며, 다만 지배 계급의 위의를 갖추기 위한 장식품을 만드는 데 종사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관청의 필요에 따라 의무적으로 일을 해야 되었으며 보수는 없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제품을 만들었을 때에는 공장세를 내기로 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수공업이 시종일관 침체한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은 상품 유통을 전제로 한 공업 활동이 없었으며, 상공업의 천시(賤視) 등에도 그 원인이 있는데다가 대외적으로는 중국과의 관계에서도 그 중요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예컨대 명으로부터 대량으로 수입되던 각종 우수한 공업제품은 기술수준이 떨어진 국내의 생산 활동에 큰 타격을 주었으리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에 금 150냥, 은 700냥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으나, 세종대에 이르러 금, 은의 조공을 중단하고 대신 인삼을 조공하였다. 그 이후 조정은 광업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그리고 금, 은은 물론이고 철, 구리등도 캐면 조정에 바치도록 하였다.
2) 외국과의 무역 및 상업
위와 같은 사회적인 여건 속에서 상업의 활동이 활발치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상업활동은 일상생활의 필수품을 물물 교환하는 정도의 경제체제에서 머무르고 말았다. 민간에서는 일반적으로 장시(시장)를 통하여 상업 활동이 행하여졌다. 장은 보통 5일마다 한 번씩 열려서 농민·어부들이 모여들어 물건을 팔고 샀다. 이렇게 기일을 정하여서 장이 열렸던 것은 각 지방의 상업적인 발달이 없었기 때문에서인 듯하다.
국내에서의 경제 활동 외에도 중국·여진·일본 등의 외국과의 무역도 행하여졌다. 명에 대해서는 소위 조공이라는 형식을 통한 공무역과 사신 일행이 행하는 사무역 등이 있었으며, 일본과 여진 및 유구 등과는 교린 외교를 통하여 그들의 진상품을 받는 형식의 공무역이 있었고, 북쪽의 중강·북관, 남쪽의 왜관에서의 개시를 통하여서는 민간무역이 행하여졌다.
3) 화폐
조선의 경제체제가 자급자족인 물물 교환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화폐도 제대로 유통될 수 없었다. 한국에서도 옛날부터 화폐에 대한 관심이 커서 조선에서도 초기부터 저화(楮貨)라는 일종의 지폐와 동전을 번갈아 만들어 내어 유통시키려 하였으나 어느 것이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며, 특히 저화는 시대가 흐를수록 그 가치가 폭락하여 도무지 화폐로서의 신용과 안정성을 가지지 못한 반면, 그보다 유력한 유통수단은 여전히 쌀·마포·면포였으며, 저화는 중기에 이르러 자연히 소멸되고 말았다.
조선 초의 자급자족적인 자연 경제의 울타리 안에서 화폐 경제는 완만하게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태종 1년(1401)에 하륜 등이 주장하여 지폐인 저화를 발행하여 국폐(國幣)로 삼고 통용을 장려하였으나 일반 백성은 즐겨 사용하지 않고, 다만 녹봉(祿俸) 지불 등에 혼용되었기 때문에 경성 부근에만 통용되고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다.
세종 5년(1423)에는 조선통보(朝鮮通寶)라는 동전이, 그리고 세조 10년(1464)에는 전폐(箭幣)가 만들어졌으나, 이들은 대개 국가에서 수세(收稅)에 이용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것은 아니었다.
4. 맺음말
조선 초 사회·경제사는 이전 고려시대 보다 특히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는데, 이것은 조선 중·후기에 와서 중훙기를 맞이하는 토대를 마련하였을 뿐만 아니라 경제발전에서 백성들의 생활에 대해서 다양한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백성들의 생활이 전보다 나아지고, 이로써 의식에서도 한단계 발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선 초 사회·경제사가 후에 영향을 끼쳤다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사회·경제사는 상대적으로 조선 중·후기의 사회경제사 보다는 연구가 적었지만, 내용이 방대하여 요약을 하기에 다소 무리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특히 사회사에서 자세히 알아 보고 싶다.
※ 참고문헌
1. 정두희, <조선사회사연구> 역사학회, 1988.
2. 이호철, <조선농업사연구> 경제사학회, 1988.
3. 황하현, <조선왕조 전기의 토지제도에 관한 연구> <> 한양대학교 경제연구소, 1996.
4. 백남운저 심우성역, <<조선사회경제사>>, 동문선, 2004.
5. 진희권, <조선의 신분제도에 대한 일고찰> <<京畿行政論集>> 경기대학교 연구교류처, 2006.
6. 원유한, <조선시대 화폐사 시기 구분론> <<역사와실학>> 역사실학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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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1.19
  • 저작시기2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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