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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현대사, 근대 현대사]근현대사(근대 현대사) 인물 이범석, 근현대사(근대 현대사) 인물 이은찬, 근현대사(근대 현대사) 인물 오의선, 근현대사(근대 현대사) 인물 전태일, 근현대사(근대 현대사) 인물 최익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근현대사(근대 현대사) 인물 이범석

Ⅱ. 근현대사(근대 현대사) 인물 이은찬

Ⅲ. 근현대사(근대 현대사) 인물 오의선

Ⅳ. 근현대사(근대 현대사) 인물 전태일

Ⅴ. 근현대사(근대 현대사) 인물 최익현

참고문헌

본문내용

겨울방학 직전까지 계속되었다.11월 25일에는 기독교인들이 신구교 합동으로 전태일 추모예배를 가졌는데, 이날 추도사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여기서 전태일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1970년 겨울부터 1971년 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전태일’이라는 낯선 이름 석자는 사회여론의 움직임속에, 신문과 잡지들의 보도와 논설속에, 정치인들의 구호와 선전속에, 종교인들의 참회와 기도속에, 그리고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부르짖음과 가슴속에 쉴 새 없이 떠올랐다 가라앉으며 이상한 충격을 전파하는 이름이었다.
전태일이 죽어가면서 말한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절규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Ⅴ. 근현대사(근대 현대사) 인물 최익현
최익현의 본관은 경주이고 호는 면암, 초명은 기남이며 자는 찬겸이다. 그는 신라 말기의 대학자 최치원의 세손으로서 1833년 순조 33년에 경기도 포천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4세 때 화서 이항로 문하에 들어가서 유학을 배웠다. 화서는 제자들에게 성리학의 명분론과 존왕양이의 춘추의리(春秋義理)와 척사위정에 의한 전통 회복과 창의 호국할 수 있는 정신적, 실천적 교육을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민족국가의 자주권 회복과 구국항일운동으로 승화 되어 갈 수 있었다.
최익현은 23세 때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사헌부 등의 여러 곳에서 중임을 역임하였다. 그는 1873년 2차에 걸쳐 당시 정치의 폐습시정과 대원군 탄핵을 상소하였는데 이것이 집권층 부패와 시정의 문란을 왕도정치 사상으로 날카롭게 지적하고 비판한 계유상소이며 이 상소로 10년 집정의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함으로써 왕권의 회복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대원군이 하야 하였으나 부자간을 이간시켰다는 이유로 그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75년에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가 유배에서 풀렸을 때 개항 문제가 대두되어 강화도 조약을 놓고 지부복궐하여 척화위소를 올리며 개항을 근심하여 격렬하게 반대 상소문을 올렸다. 그중 가장 우리의 폐부를 울린 글은 면암 최익현의 병자 척화상소 5개 조문이다. 그는 상소의 굳은 의지를 나타내기 위해 도끼를 들고 고종 황제 앞에 나아가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하시려거든 이 도끼로 먼저 제목을 치시고 하십시오.”라고 호소하였다. 그의 상소는 당시 조선의 정치, 경제 및 도덕에 대한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0
첫째, 화친을 맺는 것은 좋으나 화친의 주도권이 이미 일본 손에 있기에 그 시점에서의 화친은 일본에 대한 굴종밖에 다른 것이 전혀 없다는 것.
둘째, 일본은 공업국인데 우리나라는 농업국이기에 공업의 무한대한 역량을 농업의 유한역량으로 대응하기 힘들다는 것을 들었으며, 따라서 경제 파탄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
셋째, 일본은 지금 서양 풍속에 젖어있어 그것이 그대로 들어오면 우리의 고유한 미풍양속이 훼손되어 결국 국가의 기강 법도가 땅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 등으로 요약되는 것이다.
도끼를 들고가 상소하는 것은 주장이 틀렸으면 죽여 달라는 표시로 강한 의지표현인데, 위정척사적 의병운동과 성격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 상소로 최익현은 다시 흑산도로 유배되었으나 오히려 선비들이 갖는 참다운 충(忠)의 촉진제가 되어 거듭되는 유배 속에서 1906년까지 30편의 상소를 올리는 애국지사요 행동적 철인이었다.
갑오경장 때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여 그의 우국충정에 감복하여 공조판서를 재수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다. 이듬해 1895년에는 을미사변과 을미개혁이 잇따랐고 최익현은 상소로 항거했으며, 을미의병 때 선유대원(宣諭大員)으로 임명되었으나 거부하였다.
1904년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고종은 밀지를 보내 면암을 부르고 또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과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에 재임명하였으나(1898년에도 임명되었었음) 사양하며 항일상소만 올렸다. 이 때문에 일제는 최익현을 감금 또는 연금하여 활동을 봉쇄하였고 그 속에서 소위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에 최익현은 일제의 16개조 죄목을 들어 외국 공관과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한편 74세의 노장으로 의병전선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각도의 유림대표에게 통문을 보내 함께 봉기할 것을 종용했으나 뜻대로 안 되어 전략에 숙달된것으로 알려진 전 낙안군수(樂安郡守) 임병찬과 연락하여 전라도에서 기의할 것을 결정하였다. 1906년 6월 4일 무성서원에서 의병궐기 강회를 열어 당일 80명의 호응을 받아 기병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태인군수는 도망을 하고 정읍군수 송중면은 의병을 맞이한다. 이리하여 순창에 주둔할 때는 9백 명의 진영이 갖추어졌으나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가 공격해오자 최익현은 민족을 위한 의병이 같은 민족인 진위대와 싸울 수 없다하여 의병의 해산을 명령한다. 이 때 관군이 발포하여 정시해가 전사하고 뒤따라온 일본군에 의해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중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마도로 유배, 감금되었으나 최익현은 단식으로 항쟁하며 자진할 것을 결심, 임병찬에게 마지막 상소 즉 유소도 전하였다. 단식은 같이 유배된 의사들의 눈물어린 간청으로 중단되었으나 74세의 노령으로 의병과 감금 그리고 단식 등을 하면서 받은 충격으로 1907년 1월 1일(음력 1906년 11월 17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최익현의 유해가 부산항에 도착하자 많은 애국시민들은 철시하며 통곡했다. 최익현의 의병 자체도 그랬지만 일본 땅에서 죽어 돌아오는 광경이야말로 조선 성리학이 산화하는 한 모습이기도 했다.
참고문헌
○ 강효숙(2010), 1920년대 오의선이 항일독립운동 : 국내 항일행적을 중심으로, 용인향토문화연구회
○ 김상기(2011), 최익현의 정산 이주와 태인의병,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 노인숙(2003), 면암 최익현 사상 연구, 청람어문교육학회
○ 박영실(2003), 이범석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 박진태(2007), 한말 포천지역 의병활동과 이은찬, 대진대학교 인문학연구소
○ 박계현(2010), 40주기 사업 속에서 돌보는 전태일의 삶과 정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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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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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62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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