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노동운동,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화운동, 5 18광주민주항쟁),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청년운동,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학생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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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주광역시]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노동운동,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화운동, 5 18광주민주항쟁),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청년운동,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학생독립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노동운동

Ⅱ.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5 18광주민중항쟁(5 18광주민주화운동, 5 18광주민주항쟁)
1. 민주화의 봄
2. 학생운동에서 전면적 민중항쟁으로 전환
3. 광주5월민중항쟁의 새로운 역사적 지평 : 무장투쟁

Ⅲ.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청년운동

Ⅳ.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학생독립운동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의결하였다. 집행위원을 선출하고, 규약 수정안을 통과시키는 등, 정기대회의 상황은 지부 행사로 볼 수 없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 당시 강해석은 ‘송정청년회’의 청년동맹의 지부 결성대회에서 ‘전청련’ 대표로 축사하는 등 면 단위 지부결성에도 열성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광주청년동맹’의 간부들은 ‘당’과 ‘공청’, ‘신간회’, ‘전청련’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나갔지만 ‘광주청년동맹’ 자체의 사업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1929년 10월, “신간회 광주지회의 간부가 본부로부터 처벌을 받은 이래 획책 중인 탈회성명서에 각 회원의 연명을 강요함이 불가하다”하여 경고문을 발한 일을 제외하면, ‘광주청년동맹’의 독자적인 사업에 대해 말해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당시 비합법 영역 속에서 청년학생의 의식화와 조직사업 및 일상투쟁 지도 등에 힘썼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강해석과 장석천 등이 ‘독서회 중앙본부’를 지도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이로 보아 ‘광주청년동맹’이 전혀 활동을 하지 않았다고는 볼 수는 없을 것이다.
Ⅳ. 광주지역(광주광역시)의 학생독립운동
1929년 11월 3일, 이날은 일본인에게는 4대 명절중의 하나인 명치절이었으나, 우리에겐 음력 개천절로서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되새겨 볼만한 날이었다. 특히 학생들에게는 성진회 창립 3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이 날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명치절 기념행사에 학생들이 동원되었다. 당시 학생들은 극도로 감정이 격앙되어 있었다. 지난 10월 30일 나주역 앞에서의 한 · 일 학생간의 싸움이 빌미가 되어 수 차례의 충돌이 거듭되었기 때문이다.
11월 3일에도 광주의 중심가에서 한 · 일 학생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장재성 등의 독서회중앙부 지도세력은 학생들의 시위를 더욱 확대하는 방향으로 지도하였다. 당시 시위는 전남산 누에고치 6만석 돌파기념 경축대회에 참여한 수많은 도민과 시민들이 호응하였던 까닭에 3만 군중이 가담하였다고 표현될 정도였다. 그런데 이날의 시위는 일인학생에 대한 적개심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와 조선의 독립을 바라는 입장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시위의 양상이 격렬해지고 의외의 규모로 확대되자, 일본측은 11월 9일까지 각급 학교에 휴교조치를 내렸으며, 시위지도부는 학생투쟁지도 본부를 결성하여 학생투쟁의 전국 확산문제와 광주에서의 투쟁의 장기화 문제를 논의하였다.
학생투쟁지도 본부는 제2차 궐기 날짜를 광주 장날인 12일로 잡았다. 그것은 보다 광범한 대중의 호응과 참여를 유도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이러한 제2차 시위계획은 진상조사차 광주에 와있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 학생전위동맹 · 조선청년총동맹 등의 사회운동단체와 긴밀한 협의하에 이루어졌다. 이처럼 치밀한 계획아래 시도된 제2차 시위는 대규모 가두투쟁 형태로 전개되었다. 결국 또다시 각급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졌고, 언론기관에는 보도금지령이 하달되었다.
당시 내세운 두 종류의 격문가운데 중요한 부분만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격문 1>
1. 검거자를 즉시 우리의 손으로 탈환하라
2. 교우회 자치권을 획득하라
3. 언론 · 집회 · 결사 · 출판의 자유를 획득하라
4.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하라
5. 식민지 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6.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라
<격문 2>
1. 청년 대중이여 죽음을 초월하여 투쟁하라
2. 피검자를 즉시 석방하라
3. 만행의 광주중학을 폐쇄하라
4.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라
5. 피압박 민족 해방만세
위의 <격문 1>에서는 학생을 대상으로 하여 주로 교육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와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을 주장하였다. 식민지 노예교육이란 다름 아닌 우리 민족에게는 전문교육을 시키지 않고 식민지 사회구조에 적당한 실업교육만을 시키는 민족차별교육정책을 말한다. <격문 2>는 일반민중을 대상으로 한 것인데, 피검학생의 석방과 일제타도 그리고 피압박민족해방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참고문헌
- 김성보(1989), 광주학생운동과 사회주의 청년·학생조직, 한국역사연구회
- 김영역(2001), 5·18광주민중항쟁의 초기 성격, 한국근현대사학회
- 박만규(2000), 광주학생독립운동과 그 정신, 향토문화개발협의회
- 윤선자(2010), 광주학생운동 이후 학생운동의 변화, 문화체육관광부
- 정재호(1996), 5·18광주민중항쟁에 관한 연구, 조선대학교
- 홍성우 외 1명(2003), 광주지역 노동운동 전개과정, 전남대학교 지역개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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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13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7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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