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전후사의인식 - 노동자,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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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전후사의인식 - 노동자, 여운형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해방전후사의인식 - 노동자, 여운형


□ 해방전후시기의 노동자
 1. ~1910년대 - 토지조사사업, 조선회사령공포
 2. 러시아 혁명과 3․1운동
 3. 물산장려운동
 4. 1930년대 - 국가총동원법, 병참기지화 정책
 5. 해방, 좌우대립, 남북분단 - 노동자가 꿈꾸었던 사회?

□ 해방전후시기의 여운형
 1. ~1910년대
 2. 1910~1920년대 - 1차 세계대전, 3․1운동, 초기임시정부 활동
 3. 해방 - 건국준비위원회, 조선 인민공화국
 4. 신탁통치와 좌우대립의 심화, 분단
 5.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6. 좌우합작과 여운형의 암살
 7. 분단국가의 성립
 8. 여운형에 대한 조사를 마치며

□ 현재를 살아가는 나
 1. 친일파와 관련된 문제
 2. 대한민국 임시정부
 3. 사회주의


■참고 자료■

본문내용

관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대립과 분열의 모습을 보여준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화주의의 실현이라는 것에서 그 의의를 지니고 있으며, 각 정부의 지도자들이 서로의 통합을 모색하려 하였다는 것에서 우리는 임시정부를 높이 평가한다. 하지만 설립시기부터 보수파와 혁신파의 의견 대립이 있었고 이는 임시정부가 시작부터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임시정부는 무장독립투쟁보다는 외세의존적인 외교 전략에 집중했고 계속되는 내부에서의 의견대립 속에 보수파가 임정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된다. 그 후로 앞서 살펴본 여운형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혁신파가 임정을 멀리하게 된다. 해방 후, 국내에 ‘인공’이 있는 상황에서 국내로 들어온 ‘임정’, 그리고 지도부격인 ‘이승만’은 마치 ‘대립’에 목이라도 말라있었던 것처럼 끊임없이 좌우대립을 모색(?)한다. 이는 결국 통합정부의 좌우합작의 의의를 약화시킨 것일 뿐 아니라 ‘정부’라고 이름을 내건 임시정부의 대표성에도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임정은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이 아닌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세력 전체를 대표하는 정부가 아니며 분열된 힘없는 단체일 뿐이다. 논리적 비약일 수도 있으나 이러한 면에서 임정은 좌우합작에 실패한 반쪽 정부로써 남북분단에 커다란 ‘공헌’을 한 실패한 조직이다. 만약 임시정부가 초기에 해산되고 ‘건준’과 ‘인공’이 남한 땅에서 좀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좌우합작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남북 통일정부가 설립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확실히 임시정부 초기의 좌우분열은 후에 있을 남북분단을 암시하고 있었다.
3. 사회주의
해방 후 상당수의 민중은 현재의 ‘대한민국’의 정치체제와는 다른 사회주의 사회를 꿈꾸었다고 한다. 실제 북한에서는 사회주의자들에 의한 개혁이 일어났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그 기반을 갖추기 위해 농민에게 유리한 토지개혁과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법을 만들고 의무교육제를 도입하는 등 사회곳곳에서 상당히 민주주의 적인 정책들을 펼친다.
사회주의 국가는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시장경제 원리도 인정한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되부의 재분배를 위해 국가가 적극 개입하는 것이 사회주의다. 사회주의는 복지국가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지구화, 세계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로써는 현재의 복지국가의 위기를 볼 때 사회주의가 지구화, 세계화를 반영하기에는 한계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세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부의 재분배를 위해 국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하는 것은 시대에 역행하는 행동이다. 물론 해방 직후에 세계화와 지구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고 북한 또한 완벽한 사회주의를 구현한 것도 아니다. 현재에 사회주의가 지구화와 세계화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해서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를 통한 자유무역과 시장원리에 의해 돌아가는 현재에서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를 지향하며 해방 초기 엄청난 민주주의적 발전을 보인 북한의 ‘사회주의’는 확실히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인민에게 주권을 가져다준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 이후 민주기지에서 식민지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남한을 통일하려고 한국전쟁을 일으킨 원인으로 작용한 ‘사회주의’는 한반도에 씻을 수 없는 아픔을 남겼다고 생각된다.
남한사회에서 현재까지 사회주의와 좌익 세력을 대표하는 정당이 없이 사회주의, 공산주의가 금기시되는 모습이 나타나고 이념적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이 형성될 수 없는 것이 이때부터였다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 당시 남한에서는 사회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사회를 지지하는 노동자, 민중들과의 열린 대화가 필요했다. 그럴 때에 모두가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는 해방 후 사회체제가 자리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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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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