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조선 성리학의 발전
Ⅰ. 들어가며
1. 성리학의 정의
2. 성리학과 주자학의 구분
Ⅱ. 여말선초 성리학 왕정론의 전개
Ⅲ. 15,16세기 주자가례의 시행과 그 의의
1. 15세기의 유교정치와 성리학
2. 교화의 강조와 고례의 회복
3. 가례서의 출현과 사회제도의 변화
Ⅳ. 17세기 사상계의 재편과 예론
1. 예론의 전개
2. 기해예송과 갑인예송
3. 노ㆍ소론의 분립과 환국의 성격
Ⅴ. 나가며
<참고문헌>
Ⅰ. 들어가며
1. 성리학의 정의
2. 성리학과 주자학의 구분
Ⅱ. 여말선초 성리학 왕정론의 전개
Ⅲ. 15,16세기 주자가례의 시행과 그 의의
1. 15세기의 유교정치와 성리학
2. 교화의 강조와 고례의 회복
3. 가례서의 출현과 사회제도의 변화
Ⅳ. 17세기 사상계의 재편과 예론
1. 예론의 전개
2. 기해예송과 갑인예송
3. 노ㆍ소론의 분립과 환국의 성격
Ⅴ. 나가며
<참고문헌>
본문내용
선생이 있으면서 동시에 가학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붕당정치란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상호비판을 전제로 한다. 기존의 당쟁론이 혈연 지연 학연을 동원한 이익집단간의 세력다툼이라는 식민사관의 기저 위에 세운 논리라면 붕당론은 학자관료인 사대부가 각 학파의 학문적 차이로 인해 정치이념, 정강의 차이로 붕당이라는 이념집단을 형성하여 정책대결을 구사하게 되었다는 원론적 접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붕당정치란 여야의 역할분담을 통하여 상호비판과 견제, 갈등과 타협을 조화시켜 현대의 양당정치체제와 유사한 이상적 정치형태를 추구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들은 그 체질상 자신들의 이상과 정치이념을 현실에 구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추구와 함께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전권체제 구축을 도모하였으리라는 상정이 가능하고 이는 정치의 속성이기도 하다. 현대의 양당체제하에서도 연립정권의 구성이란 국가비상사태나 자당(自黨)만으로 자신 있는 정치를 수행할 수 없는 취약한 정부가 취하는 미봉책일 뿐이다. 환국의 시기에 상호 치열한 투쟁 끝에 피를 보고야 말았으므로 붕당정치의 본질에 어긋난다는 설은 논리상의 모순이다. 전기에 사화라는 이름으로 계속 숙청당하면서도 성장한 사림이 이제 정권을 잡고 자신들의 이상과 정치이념을 실현하려는 장에서 정권 장악을 위해 적극 돌진하며 죽음도 불사하는 것은 그 체질상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상대당의 제거를 위해 권모술수를 행한 다던가 무옥(誣獄)을 일으키는 행위도 정치기술상의 문제로 정치의 현장에서는 동서고금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붕당정치를 지나치게 이상화하거나 미화시키려는 의도가 작용하여 구도 지으려 할 때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붕당정치도 어디까지나 정치의 한 형태이며 그 극성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한계와 말폐의 조짐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달도 차면 곧 기우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따라서 17세기 후반 예송과 환국의 정쟁과 그 사이에 일어난 노론 소론의 노선분립은 예치(禮治)를 이상으로 하는 붕당정치의 전개과정에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정치행태로 파악하는 것이 오히려 무리 없는 해석일 것이다.
Ⅴ. 나가며
성리학이란 중국 송(宋) ·명(明)나라 때 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학설로 조선의 건국은 고려말 신흥사대부에 의해 수입된 신사상인 주자성리학을 기반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자성리학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개국 후 오랜 시간이 지난 16세기 후반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조선초기에는 여전히 불교, 도교, 민간신앙 등의 요소가 인습적으로 지속된 이유가 그것이다. 15세기에는 성리학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시기이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우고 유교정치를 추구하였다. 조선의 유교정치에는 세종대에 이르러 그 기반이 조성되었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유교정치를 담당할 수 있는 유학자군이 양성되었고 이들에 의하여 유교적인 의례와 제도가 정비되어갔다. 또한『주자가례』를 시행하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간행하여 유교적인 사회윤리를 보급하였다. 그러나 세종대의 성리학에 대한 관심과 학풍은 세조 이후 훈구세력의 집권으로 와해되어 버렸다. 성리학이 다시 부각이 된 것은 성종대 사림이 정권에 진출하기 시작부터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념을 실천해 보기도 전에 훈척과의 갈등으로 일어난 두 차례의 사화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16세기 사림들이 정계에 재등장한 것으로 중종대이다. 반정을 통하여 집권한 중종에게 시급한 과제는 인재를 양성하고 학풍을 진작시키는 일이었다. 이 때 등용된 사림이 바로 조광조를 비롯한 신예 사림들이다. 이들은 성리학을 장려하고 도학정치를 현실에 구현해 내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사상적으로 완벽히 정립된 이론을 갖지 못했던 이들에게는 이상만이 앞서 이는 또 다시 반정공신과의 갈등으로 이어져 기묘사화라는 사림들의 참화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에 기묘사화 이후 잔존 사림들은 그들의 실패가 성리학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지지기반의 부족이란 사실을 깨닫고 각 지방에 은거하여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서경덕, 이황, 조식 등의 불세출의 학자들이고 뒤이어 이이와 같은 대학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의 연구는 이후 조선사회를 변화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황은 주자성리학이라는 외래 사상을 완벽히 이해하였으며 이이는 이를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주자성리학을 조선성리학이라는 우리 고유의 이념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이 두 학자의 학통을 이은 제자들이 많이 양성되며 이들에 의해 동서의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17세기 조선사회는 40여년 간격으로 일어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전쟁의 후유증의 극복과정이면서 동시에 정권을 완전 장악한 순정성리학자인 사림(士林)이 체제를 재정비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성리학의 학통을 달리한 동서의 붕당이 동인은 남인,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져 사상적인 대결이 치열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또한 청의 침입 이후 자생되기 시작한 북벌론과 조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조선 중화의식이 확산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한 성씨가 500년 이상 왕조를 이어나간 나라이다. 그것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 주자성리학은 결코 우리나라를 망조에 들게 한 그런 이념이 아니다. 주자성리학은 수용될 당시 최신의 외래문화로 우리의 선조들은 그것을 조선의 것으로 바꾸어 나라를 이끌어 갔다. 이러한 문화적인 역량과 성리학의 정신적인 세계가 조선을 유래 없이 긴 왕조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참고문헌>
기세춘(2007) 성리학 개론, 바이북스
홍원식 외(2008) 성리학의 개념들, 몽배원
윤사순(1998) 한국 성리학의 특징, 삼인
이성무(1995) 조선양반사회연구, 일조각
한국사상연구회(2000) 도설로 보는 한국 유학, 예문서원
황의동(2001), 송준길의 성리학 연구, 새한철학회
이원명(1997), 고려시대 성리학 수용 연구, 국학자료원
김태영, 여말선초 성리학 왕정론의 전개, 조선시대사학보, 2000
고영진, 15 · 16 세기 주자가례의 시행과 그 의의, 한국사론, 1989
정옥자, 17세기 사상계의 재편과 예론, 한국문화, 1989
붕당정치란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상호비판을 전제로 한다. 기존의 당쟁론이 혈연 지연 학연을 동원한 이익집단간의 세력다툼이라는 식민사관의 기저 위에 세운 논리라면 붕당론은 학자관료인 사대부가 각 학파의 학문적 차이로 인해 정치이념, 정강의 차이로 붕당이라는 이념집단을 형성하여 정책대결을 구사하게 되었다는 원론적 접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붕당정치란 여야의 역할분담을 통하여 상호비판과 견제, 갈등과 타협을 조화시켜 현대의 양당정치체제와 유사한 이상적 정치형태를 추구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들은 그 체질상 자신들의 이상과 정치이념을 현실에 구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추구와 함께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전권체제 구축을 도모하였으리라는 상정이 가능하고 이는 정치의 속성이기도 하다. 현대의 양당체제하에서도 연립정권의 구성이란 국가비상사태나 자당(自黨)만으로 자신 있는 정치를 수행할 수 없는 취약한 정부가 취하는 미봉책일 뿐이다. 환국의 시기에 상호 치열한 투쟁 끝에 피를 보고야 말았으므로 붕당정치의 본질에 어긋난다는 설은 논리상의 모순이다. 전기에 사화라는 이름으로 계속 숙청당하면서도 성장한 사림이 이제 정권을 잡고 자신들의 이상과 정치이념을 실현하려는 장에서 정권 장악을 위해 적극 돌진하며 죽음도 불사하는 것은 그 체질상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상대당의 제거를 위해 권모술수를 행한 다던가 무옥(誣獄)을 일으키는 행위도 정치기술상의 문제로 정치의 현장에서는 동서고금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다만 붕당정치를 지나치게 이상화하거나 미화시키려는 의도가 작용하여 구도 지으려 할 때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붕당정치도 어디까지나 정치의 한 형태이며 그 극성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한계와 말폐의 조짐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달도 차면 곧 기우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따라서 17세기 후반 예송과 환국의 정쟁과 그 사이에 일어난 노론 소론의 노선분립은 예치(禮治)를 이상으로 하는 붕당정치의 전개과정에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정치행태로 파악하는 것이 오히려 무리 없는 해석일 것이다.
Ⅴ. 나가며
성리학이란 중국 송(宋) ·명(明)나라 때 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학설로 조선의 건국은 고려말 신흥사대부에 의해 수입된 신사상인 주자성리학을 기반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주자성리학에 대한 완벽한 이해는 개국 후 오랜 시간이 지난 16세기 후반에 가서야 이루어진다. 조선초기에는 여전히 불교, 도교, 민간신앙 등의 요소가 인습적으로 지속된 이유가 그것이다. 15세기에는 성리학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시기이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정치이념으로 내세우고 유교정치를 추구하였다. 조선의 유교정치에는 세종대에 이르러 그 기반이 조성되었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유교정치를 담당할 수 있는 유학자군이 양성되었고 이들에 의하여 유교적인 의례와 제도가 정비되어갔다. 또한『주자가례』를 시행하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간행하여 유교적인 사회윤리를 보급하였다. 그러나 세종대의 성리학에 대한 관심과 학풍은 세조 이후 훈구세력의 집권으로 와해되어 버렸다. 성리학이 다시 부각이 된 것은 성종대 사림이 정권에 진출하기 시작부터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념을 실천해 보기도 전에 훈척과의 갈등으로 일어난 두 차례의 사화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16세기 사림들이 정계에 재등장한 것으로 중종대이다. 반정을 통하여 집권한 중종에게 시급한 과제는 인재를 양성하고 학풍을 진작시키는 일이었다. 이 때 등용된 사림이 바로 조광조를 비롯한 신예 사림들이다. 이들은 성리학을 장려하고 도학정치를 현실에 구현해 내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사상적으로 완벽히 정립된 이론을 갖지 못했던 이들에게는 이상만이 앞서 이는 또 다시 반정공신과의 갈등으로 이어져 기묘사화라는 사림들의 참화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에 기묘사화 이후 잔존 사림들은 그들의 실패가 성리학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지지기반의 부족이란 사실을 깨닫고 각 지방에 은거하여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서경덕, 이황, 조식 등의 불세출의 학자들이고 뒤이어 이이와 같은 대학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의 연구는 이후 조선사회를 변화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황은 주자성리학이라는 외래 사상을 완벽히 이해하였으며 이이는 이를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주자성리학을 조선성리학이라는 우리 고유의 이념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이 두 학자의 학통을 이은 제자들이 많이 양성되며 이들에 의해 동서의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17세기 조선사회는 40여년 간격으로 일어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전쟁의 후유증의 극복과정이면서 동시에 정권을 완전 장악한 순정성리학자인 사림(士林)이 체제를 재정비하는 시기이다. 그리고 성리학의 학통을 달리한 동서의 붕당이 동인은 남인,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져 사상적인 대결이 치열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또한 청의 침입 이후 자생되기 시작한 북벌론과 조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조선 중화의식이 확산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조선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한 성씨가 500년 이상 왕조를 이어나간 나라이다. 그것에는 모두 이유가 있다. 주자성리학은 결코 우리나라를 망조에 들게 한 그런 이념이 아니다. 주자성리학은 수용될 당시 최신의 외래문화로 우리의 선조들은 그것을 조선의 것으로 바꾸어 나라를 이끌어 갔다. 이러한 문화적인 역량과 성리학의 정신적인 세계가 조선을 유래 없이 긴 왕조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참고문헌>
기세춘(2007) 성리학 개론, 바이북스
홍원식 외(2008) 성리학의 개념들, 몽배원
윤사순(1998) 한국 성리학의 특징, 삼인
이성무(1995) 조선양반사회연구, 일조각
한국사상연구회(2000) 도설로 보는 한국 유학, 예문서원
황의동(2001), 송준길의 성리학 연구, 새한철학회
이원명(1997), 고려시대 성리학 수용 연구, 국학자료원
김태영, 여말선초 성리학 왕정론의 전개, 조선시대사학보, 2000
고영진, 15 · 16 세기 주자가례의 시행과 그 의의, 한국사론, 1989
정옥자, 17세기 사상계의 재편과 예론, 한국문화,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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