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세력의 성격과 서경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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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묘청세력의 성격과 서경반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묘청세력의 성격
1) 묘청세력의 형성
2) 묘청세력의 성격과 유신지교(維新之敎) 반포
3) 서경세력
3. 서경천도운동의 배경과 성격
1)서경천도운동의 시대배경
2)서경천도론의 전개
3) 풍수와 도참
4. 서경반란
1) 서경반란의 전개과정
2) 서경 반란의 실패 요인
3) 서경 반란의 결과와 평가
5. 맺음말
6. 참고문헌

본문내용

되었지만 그 후폭풍은 고려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먼저 대외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서경파에 의한 반란이 진압됨으로써 대금 강경세력은 고려 조정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앞서 송(宋)은 고려가 금을 견제하려는 의사가 있다고 파악하고 금과 서북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는 하(夏)나라, 고려, 송 이 세 국가가 연합한다면 금을 제압할 수 있으며 승산이 보인다면 고려도 거부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러나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됨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강경하게 거부하자 고려와의 연합전선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이후 송과의 공식 통교는 보이지 않는다. 연합전선의 결별과 송의 금과의 강화로 인해 고려와 송은 정치적으로는 소원한 관계가 계속되었다.
국내에서는 서경 반란이 정국이 격변하는 계기가 되어, 인종이 묘청 등 서경세력을 잘못 기용하여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조서를 내리고, 이후 김부식 등 수구세력의 집권으로 유교적 예제 정비가 크게 강화되었다. 본래 인종대 전부터 대민시책과 예제정비는 꾸준히 이어져 왔었다. 그러나 김부식 등은 유교적 인치주의에 입각한 민의 지배를 추구하였기 때문에 대민시책보다는 유교이념에 입각한 제도상의 정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 내용에는 예제, 음서제의 정비, 한직규정, 과거제의 정비, 국학 장려, 관리급가 규정의 정비 등이 포함 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인종 14년에 집현전 수문전의 학사를 두었고, 『고려사』 권76, 인종 14년
인종 18년 4월에는 체례의 복장 제도 및 여러 의례를 정하였다. 『고려사절요』 권10, 인종 18년 4월
인종 22년에는 친히 원구에 제사를 지내고 적전을 경작하기도 하였는데, 『고려사절요』 권10, 인종 22년 1월
이는 예종대 이후 행하지 못하였던 것을 복구한 것으로서 유교적 예제를 회복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위처럼 급진적인 개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경향과는 대비되게 기존 제도의 합리적인 운영을 통해 기존질서의 회복과 지배세력의 안정화를 의도함으로써 인종 후반기에 정국이 안정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민들의 동요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하였고, 민들의 동요는 계속해서 잠재해 있는 상황이었다. 상부구조의 동요에 따라 민들의 불만은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묘청의 난은 농민봉기의 전초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실제 의종대의 정치적 파행과 지배층의 사회관리 능력 상실 등으로 무신정변과 같은 정변이 항상 예비 되어 있었다.
이상과 같은 서경 반란에 대한 의의로 김남규(金南奎)는 서경천도운동이 풍수지리도참설의 신봉자에 의해 추진되었으므로 그 기반이 합리적이지는 않으나 주도세력의 하층부와 서민층이 수탈자로서의 성격을 인식하고 개경귀족에 도전한 데에 의의가 있다고 평가하였다. 김남규, 1989「인종대의 서경천도운동과 서경반란」『고려양계지방사연구』새문사.
계속해서 박성봉(朴性鳳)은 묘청의 서경천도는 연기사상에 입각하여 고려왕실의 부흥을 표방하면서 칭제건원, 금국정벌 등 대외의식을 내세웠으므로 폭넓은 공감을 받을 수 있었으나, 김부식 등 관료세력을 이길 수 없었고 그 이후 문벌사회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더 큰 변란을 초래하였다고 보았다. 박성봉, 1986「고려 인종기의 양란과 귀족사회의 추이」『고려사의 제문제』삼양사.
한편 강성원(姜聲媛)은 묘청을 반역인이나 혁명가가 아니라 인종을 보좌하여 개경세력을 제거하고 서경천도로 정권을 장악하여, 고려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면서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제도상의 개혁을 단행하고자 한 개혁 인으로 보았다. 강성원, 1989「묘청의 재검토」『국사관논총』13.
5. 맺음말
인종과 묘청세력은 서경이라는 한 지역을 중심으로 연결된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인주 이 씨와 이자겸으로 대표되는 이자겸세력이 몰락함에 따라 인종은 새로운 자신을 지지해줄 새로운 정치세력이 필요했고, 이는 왕권강화를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던 인종이었기에 이자겸세력이 누리고 있던 권력을 왕권으로 되돌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고려 태조시기부터 중시되었던 서경의 묘청으로 대표되는 묘청세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왕권강화라는 목적 하에 이들을 이용과 함께 하게 된 것이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태조 때부터 중시한 서경을 중시한 것에서 비롯된다. 이후 풍수도참설에 의거해 몇 번의 계획이 세워졌으나 실질적인 운동으로까지 이어진 것은 인종대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는 대외관계의 변화에 따라 금에 대한 입장의 문제와 고려 내부 정치적 문제가 함께 얽혀있는 일이었다. 이는 묘청으로 대표되는 개혁세력과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보수 세력의 대결이라고도 하나 실질적으로는 정치적, 사상적 등의 다양한 문제가 얽혀있던 일이라 볼 수 있다. 결국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이 좌절되고 이어진 서경반란을 통해 고려는 대외적으로는 송에서 금에 대한 외교로 변화하게 되고 내부적으로는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정치체제의 정비가 이루어지게 된다. 묘청세력과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은 당시 고려시대의 혼란상을 잘 보여주는 사건일 것이다.
6. 참고문헌
- 오영선, 1993「인종대 정치세력의 변동과 정책의 성격」『공동연구:12세기 전반기 정치세력과 정치운영』
- 김남규, 1989「인종대의 서경천도운동과 서경반란」『고려양계지방사연구』새문사
- 박성봉, 1986「고려 인종기의 양란과 귀족사회의 추이」『고려사의 제문제』삼양사
- 강성원, 1989「묘청의 재검토」『국사관논총』13
- 마종락, 2006 「고려시대 풍수도참과 유교의 교섭」『한국중세사연구』21집
- 김기덕, 2003 고려시대 개경과 서경의 풍수지리 천도론」『한국사연구 』
- 강옥엽,「인종대 서경천도의 대두와 서경세력의 역할」『사학연구』55·56합집
- 이정신, 1996「고려의 대외관계와 묘청의 난」『사총』 제 45집
- 하현강, 1988「고려시대의 서경」『한국중세사연구』일조각
- 김윤곤, 1975 「고려귀족사회의 제문제」『한국사』국편위
- 강옥엽, 1998「高麗前期西京勢力의 硏究」『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 남인국, 1990「고려 인종대 정치지배세력의 성분과 동향」『역사교육논집』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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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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