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산책 1. 제2장과 제3장을 읽고 공자 사상의 기본이 되는 개념 ‘위기지학(爲己之學)’, ‘ 2.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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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동양철학산책 1. 제2장과 제3장을 읽고 공자 사상의 기본이 되는 개념 ‘위기지학(爲己之學)’, ‘ 2. 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동양철학산책

<과제명>

1. 제2장과 제3장을 읽고 공자 사상의 기본이 되는 개념 ‘위기지학(爲己之學)’, ‘인간다움[仁]’, 수기안인(修己安人)‘, ‘예(禮)’, ‘극기복례(克己復禮)’, ‘정명(正名)’, ‘덕(德)’의 핵심 요점을 A4 2매(쪽) 분량으로 요약하여, 충분히 자기글로 다듬어 서술하시오. 단, 교재 내용을 그대로 옮기지 마시오.
2. 실학자들이 추구했던 ‘근대를 향한 꿈’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교재 내용에 근거한 퇴계・율곡 등 조선 성리학자들의 한계와 비교하면서 A4 1매(쪽) 분량으로 서술하시오.


목차
1. 춘추전국시대와 제자백가
2. 공자의 삶 속에 어우러진 위기지학(爲己之學)
3, 인간다움, 인(仁)의 가치
4, 군자(君子)와 수기안인(修己安人)
5, 예(禮)와 정치
6, 인간다움과 극기복례
7, 정명(正名)과 덕
8, 실학(實學) - 근대를 향한 꿈

참고문헌

본문내용

여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개혁을 추구한 실학자들을 경세치용학파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유형원은 경세치용파의 선구자로 《반계수록》에서 균전론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양반 문벌제도, 과거 제도, 노비 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하였다. 이에 비해 이용후생학파는 상공업의 유통확대와 생산기구의 개량 같은 기술혁신을 통한 생산력 발전을 강조하였다. 당시 오랑캐라 배척하던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하였으므로 이들을 이용후생학파 또는 북학파라고도 한다. 그들은 주로 청나라에 내왕하면서 청조 문화의 우수함을 보고 조선에 돌아와서 그 발달한 문화를 수입하자고 주장한 사람들이었으며 대표자로는 유수원, 박제가, 홍대용, 박지원 등이다. 이중 박지원은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고, 양반 문벌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농업에서도 영농 방법의 혁신, 상업적 농업의 장려, 수리 시설의 확충 등을 통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하였다. 정약용의 학문은 성호학파에서 나왔지만 이용후생학파와 실사구시학파에도 걸쳐 있다. 정약용은 민중들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였다. 최한기는 “전통적인 기 철학 입장에서 서구 과학기술을 받아들임으로써 경험에 기반을 둔 근대적인 사유체계를 제시하였다. 경험을 토대로 귀납과 연역을 포함하는 추측(推測)을 학문 방법으로 제시하였고, 감각적인 인식을 확장하여 세계 인식으로 나가는 과정을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였다.”이처럼 18세기를 전후하여 크게 융성하였던 실학사상은 실증적, 민족적, 근대 지향적 특성을 지닌 학문이었다. 특히, 북학파 실학사상은 19세기 후반에 개화사상으로 이어졌다.
조선 선조 때에 이르러 성리학은 이황, 이이 등을 통해 절정을 이루게 된다. 이황(李滉)의 《성학십도(聖學十圖)》(1568)와 이이(李珥)의 《성학집요(聖學輯要)》(1575)이며, 아동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박세무(朴世茂)의 《동몽선습(童蒙先習)》과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이다. 특히 《성학집요》는 수신(修身)·제가(齊家)·(爲政)에 걸쳐 왕이 지켜야 할 왕도정치의 규범을 체계화한 것으로 성리학적 정치사상을 가장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명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성리학은 극히 배타적이어서 중국에서 성행하던 유학의 분파인 양명학(陽明學)은 조선에서는 이단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주자학파라도 주자와 경주(經註)에 반대하여 심한 비난을 받았으며, 학설의 다름은 당쟁(黨爭)을 유발시켜 정치·사회면에도 깊이 영향을 미쳤다. 주자학을 신봉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공자의 인의한 가르침은 잊은 채 오직 기득권에 몰두하고 사상적으로 조금이라도 마음이 들지 않으면 탄압하면서 교조적인 분위기를 이어갔다. 비록 주자학이 조선에 와서 꽃을 피웠지만 그것은 너무도 편협하고 고루한 방식이었다. 제 아무리 형이상학적인 이상이 크다고 한들 현실에서 조금의 쓸모가 없다면 그저 탁상공론에 그치는 것이다.
그러다가 후기에 이르러서야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과 서양 문물 등에 대한 지식을 얻어 공헌할 수 있는 학문인 실학(實學)이 일어났는데, 실학은 이러한 성리학의 공리공담과 탁상공론 과도한 형이상학적 경향에 반발하여 이용후생의 학문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의 꿈은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따라 서학(西學)의 중국 유입, 즉 1601년 중국에서 선교사들이 북경 개교(開敎)와 함께 포교를 위한 방법으로 《천주실의》 등의 천주교 교리서와 《기하원본》 등 서구 과학서를 번역하며 유래된 이래 지속적으로 발달된 청나라와 서양문물을 받아들임으로서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려는 일련의 움직임으로 가시화되기 시작하였다. 18세기를 전후하여 크게 융성하였던 실학사상은 실증적, 민족적, 근대 지향적 특성을 지닌 학문으로 전통적 과학 기술을 계승하면서 중국에 머물던 선교사를 통해 서양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여 과학 기술 발전에도 큰 진전을 이루었으나 조선 후기의 남루한 정치 현실을 개혁하고 사회를 변혁시키는 원동력으로는 부족하였다. 다만 실학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하였으며 서구의 과학기술에 대해 적극적인 수용의 태도를 보이면서 민중 또는 민족 대다수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리(公利)적 요소를 보였다.
참고문헌
동양철학산책,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 가격5,0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20.09.18
  • 저작시기2020.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136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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