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의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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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퇴계 이황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해동의 유종(儒宗)
2. 출생과 유년기
3. 공 직 관
4. 교 육
5. 학 문
6. 사 상
7. 문 필
8. 언 행 록
9. 백세의 사표

본문내용

썼으나 자신의 모자람은 숨기지 아니하였다. 사람을 대하기를 화기로써 하니 사람들이 저절로 존경하였고 아랫 사람을 대하기를 너그러움으로써 하니 그들이 절로 조심하였다. 한갓 절조와 선행으로써 이름을 이루려고 하지 아니하였으니, 학문과 사람됨의 올바름을 동방에서 그와 겨눌 사람이 없을 것이다.
후학을 가르치는데 싫어하지도 않고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이들을 친구처럼 대접하여 끝까지 스승으로 자처하지 않았다. 선비들이 멀리서 찾아와 질의와 가르침을 청하면 그들의 수준에 맞추어 가르치되 반드시 먼저 입지(立志)토록 하고 주경(主敬)과 궁리에 힘쓰도록 하여 순순히 계발하여 마지 아니하였다.
조목(趙穆)과 선생이 나눈 말씀이다
"학문이란 한갓 책을 읽는데 있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천하를 두루 다녀 견문을 넓혀야 하고, 의리 또한 혼자서 얻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스승과 벗의 도움과 깨우침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대의 말이 매우 옳다. 그대의 뜻한 바를 들으니 매우 가상하다"하고 "아무개는 글 재주는 매우 좋지마는 사람됨이 아주 소홀하니 한스럽다. 문학만 힘쓸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긴요하니 소홀히 해서는 안될 것이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문학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문학을 배우는 것을 어찌 소홀히 하라. 학문이라 마음을 바르게 하는 방법인데" 라고 하였다. 잠시뒤 절하고 하직하니 선생이 일어나 전송하면서 "그대는 힘쓰라"하였다.
자신을 버리고 남을 따를 줄 모르는 것이 공부하는 사람의 큰 폐단이다. 천하의 의리가 무궁한데 어찌 자신만이 옳고 남은 그르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선생이 여러 사람과 말을 나눌 때는 부드러운 말로 하여 다투지 않았다. 그러나 높은 벼슬아치[大夫]들과 말할 때에는 정색하여 철저히 시비를 가리려고 하였다.
남의 허물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혹 나쁜 소문이 들리면 반드시 가엽게 여겨 애석해 하는 뜻이 있었고 당시의 정치의 잘못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지만, 혹 좋지 않은 소문이 들리면 반드시 근심하는 기색을 나타내었다.
"형제간에 잘못이 있으면 서로 말해 주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다만 나의 성의를 다하여 깨우치게 하여야만 비로소 의리가 상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성의가 따르지 않고 한갓 말로써 바로 꾸짖으면 대개는 그 사이가 멀어지지 않은 경우가 드물다. 그러므로 옛말에 "형제이이(兄第怡怡 : 서로 온화하고 화기로운 모습)"이라 한 것은 실로 이러한 까닭이다 하였다.
선생은 검소한 것을 숭상하였다. 세숫대야는 질그릇을 썼고 앉는데는 부들자리를 깔았다. 베옷에 실띠를 매고 짚신과 대막대기를 썼는데 생활이 이렇게 담백하였다. 계상의 집은 심한 추위나 더위나 비에, 남들은 견딜 수 없을 지경이지만 선생은 넉넉한 듯이 여겼다. 영천(永川)군수 허시(許時)가 지나다가 선생을 뵙고는 "이렇게 비좁고 누추한 곳에서 어떻게 견디십니까?"하니 선생은 천천히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 어려운 것을 모릅니다." 하였다.
아들 준(寯)에게 주는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책을 읽는데 어찌 장소를 가릴 것인가. 서울에 있거나 시골에 있거나 오직 《입지》가 어떠한가에 있을 뿐이니 모름지기 십분 힘써 노력하여 날로 부지런히 공부하고 유유히 함부로 세월을 보내지 않도록 하여라."
가난하고 궁한 것은 선비의 예삿일인데 어찌 개의할 것인가. 너의 아비도 이 일로 남의 웃음거리가 된 일이 많았다. 다만 마땅히 굳게 참고 순리대로 처세하고 수양하여 하늘의 뜻을 기다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선생은 남에게 물건을 받을 때 진실로 의가 아니면 비록 조그마한 것이라도 받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고을 원이 교제의 예의로 보내는 것은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공자의 말씀에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친구라 삼지 말라" 하였으니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는 일체 사귀지 않아야 하겠습니까?"하고 덕홍이 물으니, 선생은 "예사 사람의 정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벗하기를 좋아하고 나은 사람과는 벗하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공자는 이러한 사람을 위해서 한 말이요, 일체 벗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 말은 아니다. 만일 한결같이 착한 사람만 가려서 벗한다면 이 또한 편벽(偏僻)된 일이다." 하였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귀다가 그 속에 휩쓸리면 어찌 되겠습니까"하니 "착하면 따르고 악하면 고칠 것이니 착함과 악함이 모두 다 나의 스승이며 만일 악에 휩쓸린다면 학문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하였다.
선생을 모시고 도산서당에 앉아 있었더니 들 앞에 말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서당의 일을 맡아보는 스님이 "그 사람의 행동이 과합니다. 나으리 앞을 지나면서 말에서 내리지도 않습니다." 하였다. 선생이 말하기를 "말탄 사람이 그림 속의 사람처럼 좋은 경치를 더해 주는데 무슨 허물이겠는가?" 하였다.
9. 백세의 사표
퇴계가 관리의 상으로 부각되거나 교육자 혹은 학자의 상으로 부각되거나 간에 그가 성실하고 진지한 "인간의 참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그 점이 또한 남보다 뛰어났음을 간과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한국 성리학사에 끼친 그의 영향 이외에 그의 "참다운 인간상"이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서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여 고매한 인격의 승화된 기품을 한국 유학자 중 누구보다 뚜렷이 보여 줌으로써 뒷사람들을 끝없이 매료시키는 까닭에 우리는 그를 한국 성리학자 중에서 첫 번째로 손꼽게 된다고 하겠다.
그밖에 외국의 학자들이 퇴계와 그의 학문을 찬탄한 사실은 바로 그가 지닌 학문의 깊이와 인격의 진가가 결코 국내 성리학의 영역에서만 평가될 성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일본의 근대 유학이란 임란을 통하여 수은(睡隱) 강항(姜沆, 1567-1618)과 같이 퇴계를 사숙(私淑)한 우계(牛溪) 성혼(成渾, 1635-1698)의 문인 등의 영향을 받고 발달된 만큼, 일본 유학에 대한 퇴계의 영향이란 실로 막대하다. 예를 들면 근세 일본 유학의 대표자(三大儒宗)중의 하나인 산기암재(山崎闇齋)는 퇴계 저서 중의 중요한 것을 다보고 퇴계를 존숭하여 퇴계 학문을 강론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이루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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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5.23
  • 저작시기2004.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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