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정치, 경제와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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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중앙통치조직
1)관등제
2)행정조직
3)왕도조직
4)귀족회의체

2.지방.군사제도
1)지방조직
2)군사제도
3)성곽시설

3경제구조
1)토지제도
2)조세제도
3) 산 업

4.사회구조
1) 신분제
2)법률과 풍속

본문내용

수공업도 바로 민간수공업의 원료에 전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백제는 금, 은, 청동, 철 등의 금속을 소재로 한 가공기술을 발전시켜 무기나 생산용구를 비롯하여 지배층의 위신과 사치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사치품과 일반 사람들이 쓸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여러 제품을 만들었다. 금속가공업 가운데 철가공업이 가장 비중이 컸다. 이외에 백제의 직조수공업도 금속가공수공업 못지않게 발달한 수공업이다.
4.사회구조
1) 신분제
백제는 마한과 공존하였던 원삼국시대인 3세기까지 여러 소국을 지배한 재지군장인 토호세력을 동화, 굴복시키면서 한강변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 후 백제국의 왕족들은 부여계 북부의 귀족집단과 더불어 지배층을 형성하여 신분제사회를 이루었다. 크게 나누어 왕족, 준왕족(왕비족), 귀족, 관료, 민, 노비 혹은 천류가 있었다. 백제의 관료집단은 복색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신라의 골품제도와 같이 신분상 엄격한 통제가 있지는 않았다. 단지, 일반 백성들이 지배층의 색인 붉은 계열의 색상의 옷을 입지 못하게 하여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구분하였다.
백제의 왕계로는 부여의 解慕(해모수)계이며 고구려 동명왕인 주몽의 적통을 이은 溫祚(온조)계의 扶餘氏(부여씨)가 있었고, 별도로 역시 북부여 解扶婁(해부루)의 서손이며 優台(우태)를 이어 沸流(비류)계로 계승한 優氏(우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비족으로는 진씨와 해씨가 있었다. 이들은 5세기 후반부터 등장한 백제의 대성 8족 가운데 핵심이 되는 성씨였으나, 남천 후 그 세력이 약해졌다.
한편 백제는 부여나 고구려가 5부족사회를 바탕으로 고대국가가 발전한 것과 유사한 과정을 겪었다. 그 초기에는 부족적 연맹의 성격을 간직하고 있었던 5부제가 고대국가의 체제가 성립된 후로는 수도의 행정구역으로 변화, 발전하였다. 그 후 웅진시대에는 전국을 22擔魯(담로)로 나누고 왕의 자제나 종실들을 파견하여 지방통치를 담당케 함으로써 점차 왕권의 전제화가 이루어졌다. 사비시대에는 수도의 행정권을 5부와 5항으로 정비하고 지방을 5방으로 나누었다. 이 시대에 전제왕권이 강화되었다고는 하나 왕권은 왕비족인 진씨, 해씨를 비롯하여 대성 8족 등 귀족관료들로부터 항시 견제를 받고 있었다. 백제의 귀족을 대표하는 대성 8족은 사, 연, 례, 해, 진, 국, 목, 묘씨 등8성이 있고 그 외에도 유력한 귀족 가문은 있었다. 백제는 3세기 후반에 외형상 이미 품(관등), 계(관위), 사(관부), 직(관직무)이라는 중국식 직관제의 형식을 갖추었다. 그 후 호남 일원에 존속했던 마한을 통합하여 명실공히 고대국가의 체제를 완비한 근초고왕때에 이르기까지는, 정치,군사의 대권을 장악한 좌평의 자리에 왕족으로 보이는 우씨와 더불어 왕실의 외척인 진씨, 해씨가 귀족관료로서는 최고의 권좌를 한동안 차지하였다. 이들 좌평을 포함한 제1관료군인 솔계관과, 제2관료군계인 덕계관 이상은 자.비색 옷을 입게 하여 신분을 구분하였는데 이들은 실제적으로 백제사회를 지배한 귀족계층이었다.
일반 백성층은 國人이나 民등으로 불렸는데 이때 민은 대부분 농경생활에 종사하였다. 이들이 바치는 세금이 국가 경제를 이끌어가는 재웠이었으나 초기 민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농민 이외에 상공업과 수공업에 종사한 일반 백성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 민들 밑에는 노비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은 삼국이 고대국가 체제를 형성함에 따라 공동체 사회가 점진적으로 해체되어 가는 과정에서 사회구조의 한 계층으로 발생한 것이다. 노비는 전쟁포로, 형벌에 의하여, 채무로 인하여 생겼다.
2)법률과 풍속
백제의 법은 고조선의 8조법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8조금법은 관습법의 성격을 띄고 있으며 모든 인류의 사회발전단계에서 적용되어 온 것처럼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고이왕대의 기록에 의하여 살펴보면 당시 백제 사회가 율령제에 의한 정치체제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백제의 법은 관습법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으나 형률집행에서는 수,당률인 5刑에 바탕을 두고 속죄하는 방식이 가미되어 있다. 또한 삼국이 병립하여 상호 항쟁하는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반역, 모반, 전투시 도망자 등에 대한 형벌이 가혹했으며, 가부장사회의 특징으로 부녀자의 간음을 규제하고 노비제 및 사유제산제가 강조되었던 것 같다.
마한의 연맹국 중 하나였던 백제는 한강변 하류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따라서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초기 백제어의 발원으로 인정되는 부여어(고구려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그 남쪽은 약간 달랐는데 근초고왕 이후 통합되었다고 볼 수 있다.
漢郡縣(한군현)시대 남쪽의 韓사회에는 고조선의 유민집단에 의한 유풍과 더불어 한군현을 통하여 중국측 사회풍속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남북조시대부터 시작된 활발한 교류의 결과 학술과 풍속에서 잡희, 오락에 이르기까지 백제에서 부여나 고구려사회보다 중국측 사회풍속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학술
중국으로부터 많은 학술적 지식을 받아들였는데 그 수준은 상당히 높은 것으로 고전과 사서에 능하였고 관료로서도 맡은 직무를 훌륭히 수행할 수 있는 이른바 能文能使의 소양도 갖추었던 것 같다. 언어의 경우 지배층은 부여에 바탕을 둔 부여어, 피지배층은 마한 토착어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배층은 한자어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이해된다.
-신앙
음양오행사상의 영향으로 인정되는 5제숭배 등 중국문화 계통의 영향을 제외하면, 불교가 수용된 침류왕 이전의 한성시대에는 토속신앙의 흐름이 강하게 이어져 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백제는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기도 하였는데 일본의 많은 유적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고구려와 같이 백제에서도 후기에는 도교가 수용되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금동향로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예속
남자의 경우 고구려 복식과 비슷하였으며 관에 깃을 꽂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비교적 체구와 신장이 컷던 것 같고 정결하며 예의를 갖춘 것을 알 수 있다.
-잡희
백제의 여러 잡희는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전승되어 온 중국측의 풍속이며 남북조 시대부터 수, 당시대에 이르는 교류를 통하여 생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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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2.06
  • 저작시기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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