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 그는 누구인가
본 자료는 5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해당 자료는 5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5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박정희 대통령 그는 누구인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서 론

Ⅱ . 본 론
① .박정희와 관련한 정치․사회․경제적 통찰
②.5․16의 발생 배경
㉠.정치
㉡.사회
㉢.경제
③.박정희대통령에 대한 찬성론
④.박정희대통령에 대한 비판론

Ⅲ.결 론

본문내용

, 학술, 문화, 외교, 군사 등 모든 면에서 일본과 결연을 맺어 한국이 내용적으로 일본에 자연히 흡수되도록 만들었고 모든 정책의 모범을 일본에서 배워 오게 함으로써 민족의식을 없애고 일본풍을 닮아가도록 한 것이다. 소중화(小中華)가 소대화(小大和)로 바뀐 셈이라고나 할까. 일본을 통한 서구문화의 유입도 박정희 시기에 급격하게 이루어졌다. 민족간 적대의식은 극에 달했다. 일본과 다시 통합하지 못한 것이 박정희의 한이 아니었을까 ? .
● 지나친 간섭에 관치경제 부작용
박 대통령 시절의 압축성장 전략에 따른 후유증도 적지 않았다. 정부의 역할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관치경제 체질을 고착화시키면서 시장경제 발전을 가로막는 부작용을 낳았다. 또 최근의 대우사태로 상징되는 재벌체제의 고질적인 문제점 역시 60년대 이후의 고도성장기에 배태된 것이다. 97년의 외환위기 역시 그 뿌리는 박 대통령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 박정희가 미국과 충돌한 것이 민족주의적인 발로에 따른 것이 아니다.
일제 때 모범적 사무라이로 평가를 받았던 다카기 마사오(박정희의 일본식 이름) 중좌는 일본 육사에서 교육받은 대로 일본의 적이었던 미국을 충심으로 혐오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쿠데타 이후 그가 달려간 곳은 바로 미국이었다."
● 수출위주의 정책은 결국 장기적으로는 한국을 어렵게 한 것이다.
외자 도입과 소비재 수출 위주의 경제정책은 중단기적으로 고속 성장을 낳았으나, 장기적으로는 대미대일 의존성을 영구화했다. 그 환상은 결국 한국을 `IMF'라는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무제한적으로 외채에 의존해도 몸집만 불리면 된다는 박정희식 경제의 기린아인 공룡 기업들은 언제든 한국을 다시 추락시킬 수 있는 `뇌관'으로 남아 지금도 국민을 불안하게 한다.
● 자주국방은 부국강병론이 아니다.
70년대 중후반의 `자주국방'은 박정희의 부국강병론과도 관계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베트남전 참패 이후 미국이 자국내 여론을 의식해 채택한 `아시아 반공전선의 현지화' 계획의 일환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대부분의 자주 국방 노력은 미국이 일개 사단을 철수한 후 '더 이상의 철수는 없다'라고 확약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 유신체제는 박정희 장기집권 노린 '친위 쿠데타'이다.
'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급변하는 주변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나갈 수 있는 … 일대 유신적 개혁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라는 특별선언문을 발표하고, 그 후속조치로 비상계엄령의 선포와 함께 모든 정당 및 정치 활동을 금지시켰다. 또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 국무회의를 신설하여 국회권한을 대행케하는 초헌법적 조치를 단행했다.
이어 11월 21일 야당의 반대운동이 일체 금지되고 정부의 일방적인 계몽 활동 속에서 치루어진 국민투표에서 대통령 1인에게 입법, 사법, 행정부의 모든 권한이 집중되는 이른바 「영도자적 대통령제」를 구축하기 위한 유신헌법이 91.9%의 투표율과 91.5%의 찬성률로 통과됐다. 이로써 한국정치는 민주 헌정의 중단을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되고, 87년 6월까지 독재체제의 길고 어두운 터널로 빠져들게 되었다.
대통령의 긴급조치로 일관된 유신독재 체제는 수많은 인권탄압과 민주주의 파괴를 초래함으로써 한국정치의 민주화를 결정적으로 후퇴시켰다. 특히 체제유지를 위한 정치군인의 양산은 훗날 신군부 집권의 비극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유신체제 기간동안 한국경제는 정부주도의 고도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것은 합리적인 시장경제질서와 소득분배를 가로막는 재벌특혜정책, 그리고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서 구축된 것이었다. 그리고 유신체제가 남긴 유산들로 우리 사회는 지난 20년간 또 다른 충격적 회오리 속에서 혹독한 대가를 치뤄야 했다.
● 박정희에 대한 일반적 비판
박정희는 배신과 음모, 공작정치의 명수였으며 냉혈적 인간이었다. 박정희 인생은 큰 특징은 배신이다. 박정희는 사진 조작을 통해서 부드러운 인상으로 바꾸고 많은 신경을 썼지만 아무리 조작해도 부드러워지지는 못했다. 그는 조선의 모든 청년들이 항일의 대오에 나설 때 교육계의 육사인 사범학교에 입학했다. 박정희가 사범학교에 갈 당시와 그 전후의 분위기는 항일단체들이 큰 도시는 물론이고 면 이하인 리 단위에까지 여러 종류가 조직되어있을 만큼 항일, 반일의식의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지금 활동하는 세대들은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이해할 만한 경험이 없다. 박정희가 사범학교에 재학하고 있을 때 많은 동급생들이 반일 스트라이크를 조직했으나 그의 관심은 오직 일본군인이 되는 것이었다. 해방후 박정희는 군 내부의 좌익활동에 깊숙이 관여하다가 검거되었지만 관련자들을 모두 밀고함으로써 생명을 건졌다. 이후 군에 복직하였지만 그의 관심은 정치였다. 그것도 군대를 동원한 반란으로 정권을 잡는 것이었다. 그가 정권을 쥔 이후 그보다 상관이었던 군대 지도자들은 모두 모함에 걸려 철창으로 사라졌다 또 탁월한 능력이 있는 부하들도 모두 철창 속으로 사라졌다. 누구건 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 박정희의 도량이었다. 인간적으로 늘 불안하고 권력적 허기에 절벽이던 박정희의 대통령 재임기간은 민족적으로도 큰 비극일 수밖에 없었다.
Ⅲ. 結 論
이상과 같이 박정희 대통령이 행해왔던 정치경제사회적 활동과 그에 대한 찬반 양론을 고찰해 보았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쉽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활동에 대한 단편적인 시각으로의 평가는 많은 편견을 내포할 소지가 충분한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민주화의 걸림돌이었고, 독재자였으며, 친일 성향을 가졌고, 현재 경제의 부정부패를 조장했다는 등의 많은 부정적이며 비판받을만한 활동이 많았지만, 결과론적으로 볼 때 배경이야 어찌되었든 현재 한국사회의 경제발전의 기반을 닦았던 공로는 무시할 수 없는 업적이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결론은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누가 쉽게 결론 내릴 문제라고는 보지 않기 때문이다.
※. 참고자료
실록 박정희와 김종필 김석야, 고다니 히데지로 프로젝트409
박정희를 넘어서 한국정치연구회 푸른숲
박정희 : 역사를 빛낸 큰인물 강민숙 여명미디어

키워드

  • 가격2,000
  • 페이지수15페이지
  • 등록일2007.08.22
  • 저작시기2007.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25931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