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더니즘 문학의 미술작품에 대한 상호텍스트성 -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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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1.1. 연구대상

2. 본론
2.1. 미술작품에 대한 시각적 경험이나 사전 지식의 유*무에 따른
의미작용의 차이
2.2.《마라의 죽음》의 의미작용
2.3.《유디트》의 의미작용
2.4.《사르다나팔의 죽음》의 의미작용

3. 결론

※ 참고 문헌 ※

본문내용

인간은 소통이 가능한가’라는 변용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뒤의 것은 ‘문학은 소통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 옮겨간다. 현진현, 앞의 책,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자살 안내업자라고 부를 수 있는 허구적인 인물을 내세워 허구적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회화의 이미지로부터 출발한 ‘가상 현실’은 순전한 가상일 수 없다. 하지만 작가가 ‘시각 이미지의 소설적 착종’으로 확보한 가상의 세계는 너무나 순진한 허구이기에 성공적이지 못하다.
작품의 정조를 아우르는 다비드의 그림 《마라의 죽음》에서부터 등장인물 ‘세연’에 투영된 클림트의 그림 《유디트》의 이미지는 곧바로 판타지 서사의 형태로 탈바꿈해 드러나며,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 《사르다나팔의 죽음》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이를 완결 짓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소설은 거대한 하나의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한다. 이러한 소설 공간의 확장은 회화적 공간 구성과 묘사를 문제삼는 데에서 더 나아가 회화의 ‘이미지’를 소설적 공간에 투영하여 얻은 소기의 결실을 가지고 있다. ‘소설은 회화를 포함할 수 있고 어떤 순간에는 그래야만 한다.’ 는 언급을 이제는 새로운 관점에서 확대 해석해야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는 회화 그 자체가 등장하고, 그 그림들은 소설의 진정한 제재이고 주제의식의 출발점이며 도달점이기 때문이다. 이 명화들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단순한 실마리 구실로 그치지 않는다. 같은 책
따라서 이 소설은 회화작품 같은 문학작품을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큰 의미를 가진 작품이다.
하지만 ‘문학과 미술의 소통’은 단지 문학의 일방적인 엿보기에 지나지 않은 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 소설에서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클림트의 《유디트》,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라는 세 작품을 각각의 의미체계로 기호화 하여 전체적인 큰 소설적 분위기를 창조해 내고 있다. 하지만 그 기호화가 과연 타당한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세 회화작품에 대한 시각적 경험이나 사전지식이 없는 독자라면 그저 작가가 부여하는 기의에 따라 기호화된 그 회화작품이라는 표상을 마음에 품고 전체적인 소설적 이미지를 형성시킬 것이다. 하지만 만약 회화작품에 대한 시각적 경험이나 사전지식이 있는 독자가 이 소설을 읽는다는 전제와 이 소설에서 나오는 회화작품의 기호화가 시각적 경험이나 사전지식과 아귀가 맞지 않는 현상이 일어나는 상황이 존재하게 된다면 ‘문학과 미술의 소통’은 깨지고 미술에 대한 문학의 일방적인 폭력이 가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소설의 초입 부분에 소설적 공간 이미지의 창조를 위해 차용한 《마라의 죽음》에 대한 이미지는 회화사적 관점에서 봤을 때 실상 죽음의 편안함을 강조하기 위한다기 보다는 다비드의 마라에 대한 우정과 애도에서 순교자의 모습으로 이상화된 표현이다. 따라서 마라의 편안함 모습을 기호로 죽음의 안락함을 소설적 공간 이미지로 표현하려는 김영하의 시도는 그 작품의 사전지식과는 사뭇 다른 것으로 의미 전달에 다소 무리가 따른다고 볼 수 있다.
그와 함께, 마지막 장에서 단지 살육을 관조하며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사르다나팔 왕의 상황을 부분적으로 차용은 미술사적으로 봤을 때 《사르다나팔의 죽음》이 갖는 특성인 불꽃처럼 화려한 색채, 고전주의에 대한 형식 파괴, 세련된 잔혹미, 격렬한 에로티시즘이라는 중심적 특성을 제대로 차용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 타장르의 차용은 그 이미지가 갖은 표피적 의미만을 차용해서 그것을 기호화 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층적인 의미와 중심 의미를 파악하여 기호화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못했다는 공격을 받을 소지가 충분하다.
그에 비해 작가가 《유디트》라는 미술 작품을 통해서 탁월하게 죽음과 관능의 이미지를 작중 인물에게 부여하고 있다. 이 소설의 전체적으로 흐르는 몽환적이며 성적이고 죽음과 인접한 이미지들이 유디트라는 기호로 대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학’과 ‘미술’은 그 표현양식에서 차이가 있어 완벽하게 소통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서술적인 묘사와 시각적 이미지와는 간극이 생긴다. 시각적 이미지도 서술적 묘사와 같이 주제가 있고 주제를 보조하는 배경이 존재한다. 그에 따라 화면의 구도가 결정이 되고 주제부의 배치와 부주제부의 배치가 결정되고 부각시킬 것과 부각시키지 말아야 할 것에 따라 표현이 달라진다. 이것은 소설 전체적인 구성과 자못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문학에서 소재로서 미술작품을 텍스트화 했을 때는 미술작품에서 필요한 요소만 서술하게 된다. 즉 작가가 작품의 소설적 공간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만 추출해서 서술한다는 것이다. 이건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문학과 미술의 평행적 소통이 아닌 문학이 미술에 일방적으로 강요된 소통처럼 보인다. 그에 따라 기호화되어 기표로 작용하는 미술작품이 미술사적인 평가와는 다른 양상으로 오용되어 사용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작가와 사전지식이나 시각적 경험이 있는 독자와 그런 지식이나 경험을 갖지 못한 독자와 공통된 소설적 공간 이미지를 형성시키지 못할 소지를 가지게 된다.
포스트 모던의 현상으로 탈장르화 혹은 혼성모방이 행해지고 있다. 그것들이 단지 표피적인 이미지를 모방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심층적인 이미지까지 함축하여 수용할 때 장르간의 수평적 관계가 형성될 것이며, 장르간의 공유점을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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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한 권리가 있다』, 문학동네, 1996.
김욱동,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현암사, 2001.
김윤식, 「문학과 미술의 만남」,『김윤식 선집 5』, 솔, 1996.
이석우, 『그림, 역사가 쓴 자서전』, 시공사, 2002.
林英芳, 『現代美術의 理解』, 서울대학교출판부, 1993.
현진현, 〈대중문화의 소설적 교란〉
뱅상 포마레드, 스테판 게강, 아를레트 세뤼야즈 저, 임호경 역, 『틀라크루아』, 창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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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2.01
  • 저작시기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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