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반동’ 이데올로기의 냉전적 기반
2. 치안대와 반동이데올로기의 생성 및 혼란
3. 민중들의 의식에 침전된 냉전의식과 냉전적 분단구조의 극복
2. 치안대와 반동이데올로기의 생성 및 혼란
3. 민중들의 의식에 침전된 냉전의식과 냉전적 분단구조의 극복
본문내용
들의 죄과를 벗겨주려고 했던 것은 그들에 대한 관대함보다는 그들을 용서해 주어야만이 일반 피동분자들이 안심하고 생활에 전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으로 당시 북한 사회 내에서 치안대와 관련하여 냉전적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기본계급 성분의 주동분자와 기본계급 성분의 피동분자를 구별지으면서 후자는 포섭하고 전자는 배제하는 원칙을 지키는 일과, 전 사회적으로 퍼져 있는 반동적 이데올로기의 탓으로 하여 빚어진 사회적 통합의 불안정성과 생산력의 저하를 막기 위한 분위기 쇄신의 노력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북한 사회 전체가 냉전적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만이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어떠한 정책을 기술적으로 사용한다 하더라도 결코 민중들의 역사적 경험에서 우러나온 그 의식을 지워낼 수는 없는 것임을 오히려 더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민중들의 의식에 침전된 냉전의식과 냉전적 분단구조의 극복
피동분자와 주동분자를 나누고 주동분자를 배제하는 원칙을 택하였지만 이것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은, 위에서 본 것처럼, 분명하다. 또 피동분자를 끌어안기 위하여 다각도로 노력하지만 북한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이것 역시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들은 과거의 '반동'이데올로기로부터 쉽게 벗어나기 어렵고 계속하여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다른 해결 방법은 나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당 지도부로 하여금 치안대 자료 자체에 대한 무시를 요구할 정도로 나아간다. 1969년에 행했던 한 연설에서 김일성은 치안대 자료를 무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람들의 가정형편을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을 평가하는데 참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치안대'에 든 사람들을 놓고 말한다면 그가 조국해방전쟁 때에는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가 '치안대'에 든 것을 모를 수도 있고 또 안다고 하더라도 그 영향을 받을 조건이 별로 없습니다. 후퇴 때 '치안대'에 들었다고 해도 그 기간이 10년이나 20년이 되는 것도 아니고 40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40일 동안에 아버지가 '치안대'에서 활동한 것이 그 때 어려서 멋모르던 아들에게 무슨 큰 영향을 주었겠습니까. (중략-인용자) 먼저 '치안대'에 들었던 사람들에 대한 자료에 대하여 말한다면 이제는 그것이 영향관계를 참고하는 자료로서 큰 의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료는 무시해버려야 합니다.
) 김일성, 「청소년들에 대한 공산주의적 교육 교양의 몇가지 문제」(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20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한 결론), 『김일선저작집 24권』(조선로동당출판사, 1983), 397-403면.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 민중들 내부에서는 여전히 그러한 사고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결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김삼복의 『향토』(1986)는 이를 잘 증좌해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명호는 바로 치안대 문제가 북한 사회에서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명호네는 일제시대 빈농으로 해방 후 토지를 분여받은 이른바 기본계급 성분이다. 그런데 전쟁 중에 과거 지주의 강요에 의하여 명호의 형이 이 마을 치안대장직을 맡는다. 그러나 그는 기본계급 성분이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고 이 마을에서 계속 살게 된다. 그렇지만 주위 사람들의 뜨거운 눈총을 받고 살 수가 없어 산간 지대로 가 그곳에서 양을 키우는 일을 도맡아 마을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이들에 대한 불신은 매우 강한 것이라 쉽게 그 벽이 무너지지 않는다. 명호가 이 마을에서 착실하게 공부하여 트랙터 운전수로 추천되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치안대 가족이 이 중요한 일을 맡을 수 있는가 하면서 적극 반대한다. 그리하여 그 동안 이 마을에서 묻어 두었던 과거의 상처가 다시 돋아나는 것이다. 그 결말의 해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작품에서 전쟁이 끝난 한참 후인 현재까지도 이 반동 이데올로기가 북한 사회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민중들 의식 속에 뿌리 깊이 박고 있는 이 의식은 북한 국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머리에서 조금씩 묽어질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바뀌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북한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냉전적 적대감으로 하여 이러한 과거의 상처가 결정적으로 치유될 수 있는 계기를 아직 발견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이들 피동분자들을 포용한다고 아무리 노력하여도 사회 전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냉전 이데올로기가 근본적으로 철폐되지 않는 한 일반 민중들은 쉽게 이를 머리 속에서 지워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과거 냉전적 분단구조 하에서 빚어진 냉전적 적대감이 남북간의 화해로 인하여 사라지게 되면 이는 남한 사회는 물론이고 북한 사회에서도 분단과 전쟁으로 인하여 극대화된 냉전적 적대감이 해소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남북간의 화해로 하여 남한 사회에서 '빨갱이' 이데올로기가 점점 사라지는 현실처럼, 북한 사회에서도 '반동적 이데올로기'가 그 기반을 잃게 되면 북한 사회 내에서 특히 민중들 머리 속에 침전되어 있던 냉전적 적대감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치안대 가담자에 대한 처리가 기본적으로 미군의 개입과 이에 대한 저항의 차원에서 문제되었던 것을 고려할 때 최근 북미 사이에 오고가는 적대 관계의 청산과 새로운 관계 정립은 북한 사회 내에서 이러한 냉전적 이데올로기를 해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남북관계의 화해가 이 북미 관계의 호전을 초래하였던 중요한 계기였던 것을 고려하면 앞으로 남북화해의 가속화는 한층 더 절실하고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다. 이는 또한 남북의 민중들의 나은 삶을 위해 크게 기여할 것이다.
3. 민중들의 의식에 침전된 냉전의식과 냉전적 분단구조의 극복
피동분자와 주동분자를 나누고 주동분자를 배제하는 원칙을 택하였지만 이것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은, 위에서 본 것처럼, 분명하다. 또 피동분자를 끌어안기 위하여 다각도로 노력하지만 북한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이것 역시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들은 과거의 '반동'이데올로기로부터 쉽게 벗어나기 어렵고 계속하여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제 다른 해결 방법은 나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당 지도부로 하여금 치안대 자료 자체에 대한 무시를 요구할 정도로 나아간다. 1969년에 행했던 한 연설에서 김일성은 치안대 자료를 무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람들의 가정형편을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을 평가하는데 참고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치안대'에 든 사람들을 놓고 말한다면 그가 조국해방전쟁 때에는 어렸기 때문에 아버지가 '치안대'에 든 것을 모를 수도 있고 또 안다고 하더라도 그 영향을 받을 조건이 별로 없습니다. 후퇴 때 '치안대'에 들었다고 해도 그 기간이 10년이나 20년이 되는 것도 아니고 40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40일 동안에 아버지가 '치안대'에서 활동한 것이 그 때 어려서 멋모르던 아들에게 무슨 큰 영향을 주었겠습니까. (중략-인용자) 먼저 '치안대'에 들었던 사람들에 대한 자료에 대하여 말한다면 이제는 그것이 영향관계를 참고하는 자료로서 큰 의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료는 무시해버려야 합니다.
) 김일성, 「청소년들에 대한 공산주의적 교육 교양의 몇가지 문제」(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4기 20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한 결론), 『김일선저작집 24권』(조선로동당출판사, 1983), 397-403면.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 민중들 내부에서는 여전히 그러한 사고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결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김삼복의 『향토』(1986)는 이를 잘 증좌해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명호는 바로 치안대 문제가 북한 사회에서 결코 과거의 일이 아님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명호네는 일제시대 빈농으로 해방 후 토지를 분여받은 이른바 기본계급 성분이다. 그런데 전쟁 중에 과거 지주의 강요에 의하여 명호의 형이 이 마을 치안대장직을 맡는다. 그러나 그는 기본계급 성분이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고 이 마을에서 계속 살게 된다. 그렇지만 주위 사람들의 뜨거운 눈총을 받고 살 수가 없어 산간 지대로 가 그곳에서 양을 키우는 일을 도맡아 마을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이들에 대한 불신은 매우 강한 것이라 쉽게 그 벽이 무너지지 않는다. 명호가 이 마을에서 착실하게 공부하여 트랙터 운전수로 추천되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치안대 가족이 이 중요한 일을 맡을 수 있는가 하면서 적극 반대한다. 그리하여 그 동안 이 마을에서 묻어 두었던 과거의 상처가 다시 돋아나는 것이다. 그 결말의 해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작품에서 전쟁이 끝난 한참 후인 현재까지도 이 반동 이데올로기가 북한 사회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민중들 의식 속에 뿌리 깊이 박고 있는 이 의식은 북한 국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머리에서 조금씩 묽어질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바뀌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북한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냉전적 적대감으로 하여 이러한 과거의 상처가 결정적으로 치유될 수 있는 계기를 아직 발견하고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이들 피동분자들을 포용한다고 아무리 노력하여도 사회 전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냉전 이데올로기가 근본적으로 철폐되지 않는 한 일반 민중들은 쉽게 이를 머리 속에서 지워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이루어지고 있는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과거 냉전적 분단구조 하에서 빚어진 냉전적 적대감이 남북간의 화해로 인하여 사라지게 되면 이는 남한 사회는 물론이고 북한 사회에서도 분단과 전쟁으로 인하여 극대화된 냉전적 적대감이 해소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남북간의 화해로 하여 남한 사회에서 '빨갱이' 이데올로기가 점점 사라지는 현실처럼, 북한 사회에서도 '반동적 이데올로기'가 그 기반을 잃게 되면 북한 사회 내에서 특히 민중들 머리 속에 침전되어 있던 냉전적 적대감도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치안대 가담자에 대한 처리가 기본적으로 미군의 개입과 이에 대한 저항의 차원에서 문제되었던 것을 고려할 때 최근 북미 사이에 오고가는 적대 관계의 청산과 새로운 관계 정립은 북한 사회 내에서 이러한 냉전적 이데올로기를 해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남북관계의 화해가 이 북미 관계의 호전을 초래하였던 중요한 계기였던 것을 고려하면 앞으로 남북화해의 가속화는 한층 더 절실하고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게 된다. 이는 또한 남북의 민중들의 나은 삶을 위해 크게 기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