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유래, 역사, 배경, 파견 목적, 파견 절차, 파견 당시 일본의 상황, 폐지 이유, 조선통신사 파견된 사람들, 관점, 행렬도, 특징, 관리, 시사점, 조사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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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조선통신사란 무엇인가

◆ 조선통신사의 배경 및 파견 목적

◆ 조선통신사 파견 절차

◆ 조선통신사 파견 당시 일본의 상황

◆ 조선통신사 폐지 이유

◆ 조선통신사에 파견된 사람들

◆ 조선통신사를 보는 관점

◆ 조선통신사 행렬도

본문내용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의원 / 영원 / 마상재인으로 지금의 의사 <화가> 서커스의 기예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의술이 뛰어난 사람을 선발해주십시오”라든가, “그 수를 늘려주십시오”라며 계속하여 의원을 요청하였다. 영원은 예조의 도화서에 소속도니 화가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에 처음 파견되었다. 이들은 통신사가 가는 곳의 정경이나 의례 장면을 그렸다. 마상재는 본래 임진왜란 때 시작된 것으로 기병들이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무예다. 인조 때 일본의 사절로부터 마상재인을 보내달라는 요청이 있어 시작되었고, 그 이후 통신사가 일본에 갈 때마다 마상재인 2명을 보내 마상재의 기술을 일본에 선보였다.
<음악과 행렬을 담당한 사람들>통신사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악대도 파견되었다. 장악원에 소속된 전악은 사절단의 행렬 의식 연회의 음악을 담당한 관원이었다. 각 악기의 연주자는 전악의 지휘로 연주하였다. 고수는 큰북을, 동고수는 꽹과리를, 세악수는 장구 큰북 피리 해금을 연주하였다. 그리고 풍악수라는 악대도 있었다. 그들은 연주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통신사의 악대에 선발되었다. 통신사 행렬에는 청도 형명 순시 영이라고 적힌 깃발을 든 많은 기수가 있었다. 기는 종류에 따라 그 나름의 역할이 있고 의미와 이름도 달랐다. 기수 외에도 통신사 행렬에는 무기나 모형무기 등을 들고 행진하는 사람들도 있어 통신사의 위엄을 과시하였다.<통신사를 호위하는 군관>군관은 통신사를 호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군관에는 특별히 우수한 궁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자제군관은 정사, 부사의 아들이나 친척으로 정사와 부사의 호위를 맡았다. 별파진은 화포를 담당하며 군관 중에서도 상관이었다. 그리고 삼혈총을 든 중무장한 군관도 있었다. 특히 포를 취급하는 군관들에게는 일본에서 이동하는 동안 포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는 포의 제조기술이 일본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경계하였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하급병사인 사령이 있었다. <재능이 풍부한 소동>통신사 행렬도를 자세히 보면, 머리를 땋지 않은 아이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통신사 일행이 데려간 아이들로, 소동이라고 한다. 이들은 일행을 수행하면서 견문을 넓혔으며, 춤이나 노래 등으로 일행의 무료함을 달래주기도 하였다. 지금도 일본의 우시마도에는 당시 소동들이 추었다고 여겨지는 '가라코 춤'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그들이 춤에도 능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조선통신사를 보는 관점
일본의 사학계 일각에서 조선 통신사를 조공 사절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은, 조선 통신사에 대응할 만한 일본 측 사절단의 파견이 없었다는 점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건국 이래 개항할 때까지 외교정책은 성리학적 외교원칙인 사대교린으로서, 중화에 버금가는 소중화를 자처하고 있었던 조선으로서는 여진, 일본, 류큐 등은 어디까지나 교린의 대상이었지, 결코 사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통신사 파견에 대한 일본학계의 자의적인 해석은 나올 수 있어도, 당시의 조선이 사대의 목적으로 통신사를 파견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통신사 파견 요청 자체가 전적으로 에도 막부 측의 강력한 요청에 따른 것이었으며,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그에 대응할 만한 일본국왕사가 있었다. 또한 그 이후에는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군이 일본국왕사의 상경로로 침공한 것에 대한 응분의 조치로 일본 사절단의 상경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일본 막부 측에서 조선 국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대마도로 하여금 대차왜(大差倭)를 파견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 통신사를 깎아내리는 경향은 에도 막부 당시의 국학파들 사이에 존재했으며, 조선에서는 자국의 국왕이 일본의 천황이 아닌 고작 쇼군 따위와 동등한 지위로 외교 관계를 맺는데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여론이 일었다.
원중거 등 파견된 통신사 중 일부는 일본의 이중적인 권력구조를 파악하고 나서 비록 실권 없이 상징적이기는 하나, 형식상 쇼군을 임명하는 국가의 상징이 되어 있는 천황의 존재를 의식하여, 후일에 막부를 타도하고 천황을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일본에서 일어나면, 형식상 천황의 신하인 쇼군과 동등한 지위를 맺고 있는 조선 국왕에 대해서 외교의례적 문제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이 예견은 실제로 메이지 유신에 의하여 현실화되었다.
이 또한 19세기에 들어 조선 통신사의 파견이 중단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조선통신사 행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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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7.17
  • 저작시기2012.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65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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