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체제의 형성과 독일 교회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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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히틀러 체제의 형성과 독일 교회의 반응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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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30년대의 독일 교회 특히, 루터 교회는 나치당에 대한 책임 있는 정치적 비판보다 순응, 또는 “정치적 저항이 없는 저항” 장효순. 앞의 글. p.62.
을 택하였다. 대부분의 루터 교회가 DC의 입장에 선 것은, 루터의 두 왕국론이 저항을 촉진하기보다는 그 반대의 측면이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르트 역시 두 왕국론이 독일 교회의 “이원론”적 측면과 세속적 삶의 영역의 “자체 법칙성”을 초래하였다고 비판한다.(윤응진, 1993:144-145) 루터가 그리스도의 통치영역을 교회와 개인적 영역에 국한시킨 것과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책임에 대한 요구를 약화시킨 것은 올바른 성경의 가르침일 수 없다. 20세기 초 독일에서 루터의 두 왕국론은, 교회와 기독교인의 정치적 무관심 또는 정치적 문맹의 원인이었으며, 세속권력에 대한 교회의 타협과 무책임을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었다.(윤응진, 앞의 글:147)
제4장. 결 론
제1절. 요 약
요컨대, 히틀러 체제 형성은 시대의 산물이다.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의 심화와 심리적 불안은 안정과 번영을 약속하는 정권의 출현을 요청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히틀러의 집권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히틀러 체제에 대한 독일 교회의 두 가지 상반된 흐름을 살펴보았다. 양분된 교회의 양상은 신학적 입장 차이와 루터의 ‘두 왕국론’에 대한 해석의 차이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국가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 국가와 교회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독일 교회의 실존적 고민을 추적하였다. DC는 국가를 하나님께서 세상의 질서를 위해 세우신 기구로 보았다. 그래서 국가와 교회가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BK는 여기에 대해 반발하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하였다. 국가와 교회는 분리될 수 없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불연속성 또한 분명하기 때문이다.
제2절. 함 의
이제 고백교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내달린 나의 작업을 마치려 한다. 만약 ‘내가 1930년대 독일에 있었다면’ 이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심정적으로 DC보다 BK로 쏠릴 것이다. 히틀러에 동조한 어리석음보다 이에 저항한 BK의 신앙과 판단을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BK 역시 시대의 산물이며, 루터의 사상적 한계를 물려받고 있었다. 루터는 개인의 내면적 자유를 강조했지만, 이와 관련된 제도적 측면에 대해 소홀했다. 고백교회 역시 정치·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보다는 종교적인 측면에 자신을 한정시키는 방어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고백교회가 취했던 개혁에 대해 선을 긋듯이 그 한계를 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역시 역사적 지반 위에 서 있으며, 우리가 취하는 ‘최선의 개혁’일지라도 결국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기 힘들기 때문이다. 대신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를 배운다. 나치즘에 대해 독일 교회들이 반응했던 양상들을 보면서 시대를 읽는 역사적 안목과 끊임없는 성찰이 필요함을 느낀다. 우리가 취해야 할 개혁주의적 태도와 사회참여란 어떠한 것인가? 1930년대 독일 교회와 우리는 똑같은 질문과 마주하고 있다. 칼빈주의는 역사적으로 시대를 변혁시키는 힘을 지녀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시대에 순응하는 논리가 아니라 변혁시킨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칼빈에게 있어 "성도"의 세속화된 개념은 시민이었고 성도, 즉 시민은 혁명가들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요청을 보여준다. 칼빈은 사회를 파괴하지 않고 악을 근절하여 질서에 기반을 둔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하려고 희망하였다. 그렇다면 우리의 최대의 문제는 그것이 오늘날도 동일하게 성취될 수 있는가의 여부일 것이다. 이 땅, 이념의 문제로, 또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문제로 혼란한 지금, 우리는 방지일 목사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방지일 목사님의 말로써 내가 할 말을 대신하며 결론을 맺고자 한다.
“교회의 사회참여나 어떤 사상 운동에 교회가 이용되는 것이 마치 교회 본연의 사명인 양 몰고 나가며, 심지어 그런 것에 참여하지 않으면 교회가 교회 본연의 사명을 다하지 않고 사회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몰아 가는 것을 본다. 거기에 더하여 이런 방면으로 나아가는 지도자라야 참 지도자인 듯 평가하기도 한다. 아마도 이러한 경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해질 것이다. 그러나 교회 본연의 사명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 참여에 관여할 단체는 얼마든지 있다. 오직 교회 본연의 사명은 십자가의 구속에 있는 것 뿐이다. 민족운동이 아니다. 물론 믿는 사람으로서 조국을 사랑하고 동포를 위하는 것은 마땅한 본분이지만 교회가 어떠한 운동의 선도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구령사업만이 교회가 해야할 사명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언제든지 자기 사명에 살아야 한다.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다.” 방지일. 1963. 피의 복음. 서울 : 선교문화사, p. 1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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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지일. 1963. 피의 복음. 서울 : 선교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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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9.03
  • 저작시기2013.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36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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