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고전읽기 - 세종 3년 1월~세종 4년 10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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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회과학 고전읽기 - 세종 3년 1월~세종 4년 10월까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세종 3년
세종 4년

제일 흥미있었던 사건 조사

제목 : 양녕에 대한 견제와 비방

본문내용

사간원에서 김인달을 극형에 처하도록 상소하다
사간원에서 상소하기를,
김인달(金仁達)이 사사로이 양녕(讓寧)과 통하여, 그 죄가 이미 드러났는데, 전하께서 생을 좋아하는 덕으로 감면시키니, 무엇으로 후일을 징계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영락 16년의 교지(敎旨)에 의하여, 인달을 극형에 처하여 그 나머지 사람을 경계하였으면 다행이겠나이다.
하였다
.8월
세종 017 04/08/27 (신해) 001 / 태백성이 낮에 보이다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보였다.
세종 017 04/08/30 (갑인) 001 / 사직 고기충을 보내 중국인 33명을 요동으로 보내도록 하다
사직(司直) 고기충(高起忠)을 보내어 중국 사람 송득룡(宋得龍) 등 33명을 요동으로 풀어 보냈다.
9월
세종 017 04/09/19 (계유) 002 / 대호군 유언강이 목베임을 당하다
대호군(大護軍) 유언강(庾彦剛)이 목베임을 당하였다. 언강은 본래 한미한 신분으로 성질이 거칠고 더러웠다. 태종의 딸 숙진 옹주(淑眞翁主)가 어렸을 때에, 병을 피하여 밖에 있게 되었을 제 언강의 집 여비(女婢)가 가서 젖을 먹였다. 그로 인하여 수양(收養)이 되었는데, 언강은 그러한 관계로 대호군(大護軍)까지 이르게 되었다. 옹주는 언강(彦剛)의 집에서 일성군(日城君) 정효전(鄭孝全)에게 시집갔었다. 태종이 훙(薨)하심에 미쳐서, 언강의 생각으로 다시는 의탁할 데가 없다 하여, 드디어 효전을 소원하게 하여 여러 번 같이 살 수가 없다고 말하면서 구박하여 달리 살게 하였으며, 접대하는 언사도 또한 불공하였다. 하루는 효전이 밥을 먹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며 나가거늘, 임금이 듣고 의금부(義禁府)에 내려 국문하게 한바, 배은 망덕(背恩忘德)과 마음에 불충한 생각이 있다 하여 베인 것이었다.
세종 017 04/09/28 (임오) 003 / 영등포 만호 김득생을 처벌하다
경상도 관찰사가 계하기를,
영등포 만호(永登浦萬戶) 김득생(金得生)이 군수의 잡물(雜物)을 사유로 훔쳐 들이고, 또 아들이나 사위와 자기가 사랑하는 기생에게 주었다.
하거늘, 곤장 1백 대에 파직(罷職)시키라고 명하였다.
10월
세종 018 04/10/02 (병술) 005 / 전 호군 김인을 참형에 처하다
전 호군(前護軍) 김인(金仁)을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처음에 내섬시(內贍寺)의 종 근만(斤萬)이 왕의 친족[王親]이요, 원종 공신(元從功臣)이라 거짓 일컬으니, 인(仁)이 그와 더불어 서로 응하여 거짓 태종(太宗)을 위하여 재(齋)를 올린다 하고, 주군(州郡)으로 마구 돌아다니면서 많이 토색하여 그 사욕을 채우고, 또 거짓 내지(內旨)를 관찰사에게 전하였으므로, 이들을 체포하여 모두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세종 018 04/10/11 (을미) 003 / 민무구무질무회의 딸들을 벼슬하지 않은 사람과 혼인하도록 하다
노한(盧?)에게 명하기를,
민무구(閔無咎)무질(無疾)무회(無悔)의 딸들은 조정에 벼슬하지 않은 사람과 혼인(婚姻)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제일 흥미있었던 사건 조사
제목 : 양녕에 대한 견제와 비방
사헌부에서 상소하기를,
신들이 이제 성상(聖上)이 상중에 계시는 날을 당하여 감히 성상의 들으심을 괴롭게 하여 죄송스럽기 말할 수 없나이다. 생각건대, 양녕 대군 이제는 이미 임금과 어버이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국민에게 죄를 얻게 되었으니, 속적(屬籍)에서 없애버려야 할 것인데, 우리 태상 전하께서 다만 외방으로 내쫓아서 살 바를 얻게 하고, 또 태상왕이 편치 못할 때 불러서 시측(侍側)시켰으니, 은덕이 지극하였나이다. 성복(成服)한 뒤에도 아직 금중(禁中)에 있으니, 진실로 대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신들과 정부제조는 전일에 이미 상항(上項)의 사리를 계달하였는데, 지금까지 허락을 받지 못하였으니, 깊이 유감으로 여기는 바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춘추(春秋)의 근엄한 법에 의하여, 곧 밖으로 내보내서 왕래를 끊게 하여, 태상의 뜻에 부합하게 하고, 신민의 바람을 위로하여 주시면, 종묘와 사직의 다행일까 하나이다.하였다.
사간원에서 상소하기를,
신들은 생각건대, 양녕 대군 이제는 임금이요 아버지인 태상에게 죄를 얻어, 밖으로 쫓겨나가 살다가, 태상 전하의 병환을 당하여 금중(禁中)에 불려 들어왔는데, 염(?)빈(殯)성복(成服)을 지난 지 이미 열흘이 되어도 아직 금중에 머물러 있으니,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이 대단히 혐의쩍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전하의 우애가 두터운 것은 좋으나, 종묘와 사직의 큰 일에는 어떠할까 합니다. 태상 전하께서 이미 결정한 명령이 있으니, 바라건대, 대의(大義)로 단정하여 본디 있던 곳으로 돌려 보내서, 신민의 바람을 위로하여 주시면 종묘와 사직의 다행일까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아직 상차(喪次)에 계시므로 모두 계하지 못하였다.
세종실록을 보면 양녕대군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나 그 내용의 대부분은 양녕을 벌주자는 이야기, 내쫓자는 이야기, 귀양보내자는
이야기, 양녕대군의 흠잡기이다. 이는 실제로 양녕대군이 그당시의 미풍양속과 보수적인
사회구조에 적응못하고 실제로도 다소 난잡하고 쾌락지향적인 삶을 살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지나칠정도로 고자질?을 하는 충신?들의 모습이 그다지 바람직해보이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미 양녕은 권력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아직 세종의 왕위가 굳건하게
굳어진 상태가 아니었고, 만약 반역이나 쿠데타를 일으킬만한 인물이 있다면 그것은
효령대군이 아니라 양녕대군일 수 있다고 생각해서 견제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종은 양녕에게는 상당히 너그럽게 대했고, 오히려 세자시절보다는 훨씬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하게 지켜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현실주의자, 금욕주의자로 살았던
세종과 쾌락주의자, 낭만주의자, 이상주의자로 풍류를 즐기며 살았던 양녕...과연 누가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개인적으로는 행복 한 삶 자체로는 세종(충녕)이 아니라 양녕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국가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진정 세종이 왕이 된 것이 조선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한 것임에 틀림 없으므로 그들 둘의 삶을 단순히 비교하기보다는 개개인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한 접근방법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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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6.01.16
  • 저작시기20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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