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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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의 역사와 주요 사건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유신붕괴의 직접 도화선 ― 부․마 항쟁

2. 10 26 ; 그날 이후

3. 반동의 시작 - 12.12 쿠테타

4. ‘ 서울의 봄 ’ - 거리로, 거리로 !

5. 광주 민중 항쟁 (작전명령 - 화려한 휴가)

6. 1980년 9월에서 83년 12월 까지

7. 84년 1월부터 86년 2월까지

8. 6 29 선언

9. 결론

본문내용

저의를 숨김없이 드러낸 것이었다. 이어 3월 6일에 방한한 슐츠는 “정치적 문제를 폭력이나 거리에서의 소요 사태로 해결하려는 것은 배격해야 한다”며 민중이 개헌 정국의 직접적인 변수로 등장하는 것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같이 따라온 클라크는 “이 총재만 믿겠다”,“직선제를 고집하는 것은 분수도 모르는 답답한 행위”운운하며 ‘직선제 포기와 내각제로의 타협’을 공공연히 강요하였다. 방한한 미국무성 관리들이 ‘이민우 구상’을 지지하고 나서자, 신민당은 다시금 이를 둘러싼 내분에 휩싸였고, 이제껏 미국의 ‘모종의’ 제스쳐를 ‘혹시나’하는 기대 속에서 기다리던 양김씨의 ‘주류’는 미국의 지지를 획득할 가능성이 전무하게 되자, 다시금 국민들을 향해 설 수밖에 없었다. 직선제가 관철되지 않는 이상 자신들의 집권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이른바 ‘주류’는 2.7, 3.3에서 나타난 국민들의 열기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일대 ‘정치적’ 도박을 행하게 되었다. 4월 8일의 신민당 분당과 ‘통일민주당’의 창당(5.1)이 그것이었다.
8. 629 선언
(미국 시간) 28일 아침, 슐츠가 NBC-TV에서 행한 ‘예언’은 신기하게도 불과 몇 시간 후 서울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나란히 앉은 이춘구, 이한동 등이 침통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는 가운데 노태우는 ‘위대한 결단’을 발표하고 있었다.
또 한 명의 ‘체육관 대통령’이 될 뻔했던 노태우는 6월 29일, 1.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에 의한 연내 대통령 선거와 내년 2월 정권 이양, 2. 대통령 선거법 개정, 3. 김대중씨의 사면복권,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 관련 사범의 석방, 4. 국민 기본권의 신장, 5. 언론 자유의 창달, 6. 지방 자치제의 실시와 대학의 자율화, 7.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 8.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 등 통칭 ‘629선언’ 이라 불리우는 시국 수습 8개 항을 내놓았고, 7월 1일 전두환이 이를 수락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6월 항쟁은 막을 내렸다.
신문에는 노태우의 사진이 지면 가득 실렸고, 629 선언은 회대의 영단으로 평가되었으며, KBS와 MBC는 노태우 대표 위원의 외롭고 고독한 사색에서 나온 ‘위대한 결단’ 때문에 민주화의 새 시대가 열렸다고 야단법석이었다. 국민들도 처음에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다가 곧바로 승리감에 이끌렸고 - 그것은 일부 변혁 운동 세력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어제의 학살자는 오늘 민주주의를 기사 회생시킨 위대한 지도자로 각광받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그것은 분명코 승리였다. 6월의 열 아흐레 간 지축을 뒤흔든 범국민적 대투쟁의 너무도 당연한 쟁취물이었고, 경찰의 물리력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었던 정권과 반미 투쟁으로의 발전을 드려워한 미국의 굴복이었으며, 위대한 한국 민중의 민주적 변혁 의지를 유감없이 과시한 쾌거였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분명히 투쟁의 종결점이 아니었다. 아니, 투쟁의 종결점이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물론 초기에는 ‘호헌 철폐’를 외치며 ‘개헌 논의 재개’를 요구하였지만 계속되는 투쟁을 통해 경험을 축적해 온 민중들은, 이제 ‘개헌’을 통한 평화적 정권 이양보다도 ‘군부 독재의 즉각 퇴진’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렇듯 민중들은 자신들의 투쟁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의식을 스스로 변화시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지도부’는 이것을 간파하지 못한 채 ‘민주 헌법, 민주 정부’라는 애매모호한 슬로건을 외쳐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민주당이 주장하던 ‘민주’ - 직선 개헌을 통한 민선 민간 정부 수립- 로의 사실상의 ‘전략’이었다. 또한 거기엔 정권과 미국의 간교한 후퇴 전술이 숨어 있었다. 629 선언의 실내용이 입증하듯 그것은 제한적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기만적이었으며, 기층 민중의 민주민권 요구는 완전히 배제된 채 중산 계층과 민주당. 그리고 일부 재야의 이해만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는 마치 점령지에서 퇴각하는 군대가 이후 그곳에 진주할 적군에 대하여 각종의 함정과 폭탄과 저격병을 남겨두는 것과 비슷한 이치로 시위 군중을 중산층과 기층 민중으로 나누어 분리시키고, 민주당을 장내로 끌어들이며, ‘국민 운동 본부’등 온건 재야 - 바로 그 온건이 그들의 치명적 한계였다 -를 약화시킴으로써 현실적인 투쟁의 이슈와 가능성을 없앤 것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고도의 책략은 실제로 먹혀 들었다. 물론, 그들이 전지전능해서가 아니라, 그에 대항할 민중의 힘과 그 구심이어야 할 변혁운동 세력이 튼튼하지 못하고 또 결합되어 있지도 않았던 까닭이다. 바로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온 이들의 기만 전술이 시위를 잠재우고, 근거 없는 민주화 낙관론을 만연시켜 갔다. 그러나, 629 선언이 있은 지 채 일주일이 못되어 이들의 기만 전술을 낱낱이 폭로하며 자신들의 역사적 사명을 온 누리에 선포한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바로 ‘노동자 계급’이었다!
9. 결론
민중이 투쟁의 전선에 폭발적으로 대두한 이 시기에 현대적 의미에서 민중이 갖고 있는 역량과 학생운동을 비롯한 변혁 운동의 역량, 그리고 미국과 정권의 실체 등은 여지없이 드러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민중의 놀라운 각성과 성장은 이제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이론과 실천을 운동 세력에 요구하고 있으며, 학생들을 포함한 변혁 운동 세력이 그들의 역사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요구가 무엇인지를 겸허하게 파악하는 것, 또 이를 이론과 실천의 양면에서 실현시키려는 노력이 절박한 지상 과제로 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의미에서 학생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학생운동이라면 막연하게 생각해온게 사실이다. 이렇게 체계적인 이론과 행동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이번 조사를 하면서 정부측에 대한 약간의 불신감이 생긴것도 사실이다. 629선언만 해도 좋게만 받아들였던 내 자신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실에 대해 한번쯤은 다르게 생각해볼 필요를 느낀다. 예를 들어 프로야구가 처음 생겼을 때 마냥 좋아했던 초등학교 시절에 비해 지금처럼 국민의 관심을 다른곳으로 돌리기 위한 하나의 전략적 전술에 있었다는 생각처럼 한번쯤은 돌려서 생각해볼 필요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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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7.04
  • 저작시기20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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