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과 기독교 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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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로마제국과 기독교 박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기독교 박해의 원인
1. 정치적 배경
2. 종교적 배경
3. 사회적 배경

Ⅲ. 기독교 박해의 실태
1. 제1차 박해기간(A.D.64-96)
2. 제2차 박해기간(A.D.98-249)
3. 제3차 박해기간(A.D.249-313)

Ⅳ.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공인

Ⅴ.맺음말

본문내용

5
Ⅳ.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공인
콘스탄티누스는 A.D288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누스가 죽은후 그의 부하들이 콘스탄티누스를 후계자로 임명한후 제국에는 권력투쟁이 시작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맥시미안의 딸 파우스타와 결혼하여 정치적인 입지를 강화시켰다.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이교적 마술을 의지'하고 있던 막센티우스를 로마의 권좌에서 축출하기 위해 위해 이탈리아로 행진했다. 밀리안 전투 하루전 대낮에 콘스탄티누스는 붉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하늘에서 승리의 십자가 표시를 보았고 그 위에는 '이 표지를 정복하라'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이 승리의 표시가 태양신이 보내신 것이라고 확신한 콘스탄티누스는 만약 전투에서 이긴다면 태양신의 전사가 되겠다고 서약했다. 다음날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동방에서도 유사한 변화가 있었다. 305년 디오크레타안이 막시미안과 함께 퇴위한 후 갈레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자리에 차지했다. 갈레리우스는 307년에 그의 친구이자 동료 군인인 리키니우스를 일리리아와 마케도니아를 통치할 아우구스투스로 임명했다. 리키니우스는 정지적인 야심을 갖고 콘스탄티누스과 동맹을 맺고 콘스탄티누스의 누이를 아내로 맞았다. 313년 콘스탄티누스과 리키니우스는 밀라노 칙령(THE EIDCT OF MILAN)이라 알려진 것을 공표했다. 이 밀라노 칙령은 공식적으로 교회에 종교의 자유를 선표한 최초의 선언이었다. 핍박받으며 음성적으로 활동하던 기독교가 밀라노 칙령으로 공식적인 자유를 허용받은 셈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한 결정적인 이유는 전년도에 있었던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의 승리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의 공인에서 멈추지 않고 기독교인들에게 재산권에 대한 구체적인 자유를 보장하였다. 아프리카의 총독 아눌리누스에게 보낸 그의 공문에는 "도시나 여러 지방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보편교회의 재산으로서 현재 원로원 의원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모든 재산을 모두 돌려주어야 한다."며 명문화 시켰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에 대한 호의는 재산권 보호에서 끝나지 않았다. 같은 해 황제는 교회 사역자들의 경비를 보조하기 카르타고 감독 카이실리안에게 3000폴리(약 10000달러)를 하사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심령이 안정되지 못한 몇 사람들이 위험하게도 교회를 변조하여 백성들을 거룩한 보편교회로부터 빗나가게하는 것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그의 관심이 재정적인 문제를 넘어 교리적인 문제로까지 확대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313년 아눌리누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콘스탄티누스는 "거룩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교가 멸시를 받을 때 국사가 대한한 위험에 처했고, 반대로 이 종교를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지켜갈 때 탁월한 축복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고 예배하며 경배하는 것이 로마의 안녕과 직결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에 대한 배려는 단순히 기독교 공인에서 끝나지 않고 로마의 기독교화라는 인상까지 느낄 정도로 광범위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콘스탄티누스는 점점 더 뚜렷이 기독교에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성직저들에게도 면세를 확대해 주었고, 기독교의 주일을 공휴일로 제정했으며, 교회의 절기를 존중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보다 기독교에 대한 관심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은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정부를 비잔티움으로 옮긴 다음 그 도시를 확대해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하고 그곳에 건축한 수많은 교회들이다. 파손된 이교사원을 수리하거나 다시 건립하는 것을 금지했고, 기독교인들이 이교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막았다. 비록 그가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일련의 기독교에 대한 정책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분명 기독교인이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고무되었던 기독교 붐은 아들들에 와서도 계속되어 기독교인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로마에서 가장 우대받으며 군림하는 종교가 되었다.
Ⅴ.맺음말
이와 같이 기독교 박해에 대한 원인을 3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본론에서 살펴본 기독교 박해의 원인을 조금 더 간추려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회적 원인으로 기독교인의 우상 숭배 거부와 우상 숭배가 바탕이 된 로마 사회의 관습에 따라, 기독교인의 배타성으로 인한 로마대중의 혐오심, 이렇게 기독교 박해의 사회적 배경을 살펴 볼 수 있다. 그리고 당나귀 숭배, 근친상간, 식인 습관 등 기독교에 대한 로마 사회의 편견과 오해에서 역시 기독교 박해의 첨부적인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정치적 원인으로는 두 차례 유대 전쟁으로 인한 로마인의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이 기독교인에게 전이된 것과 기독교인의 황제 숭배 거부로 인하여 反로마 집단으로 인식된 것이 그 원인이 되어 박해의 정치적 원인을 들 수 있다. 셋째, 종교적 원인은 혼합주의적 로마 제국 종교와 기독교인의 유일신앙과의 대립에서 온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박해의 주된 원인이라고 보기엔 본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소 중요도가 떨어지지 않나 생각된다. 기독교는 많은 핍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가 되어 교회는 꾸준하게 성장해왔다. 핍박이라는 기독교 장애물이 오히려 기독교를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그리고 현 문명사회의 주류를 이끌고 있는, 특히 로마 제국의 박해를 이기고 오히려 로마제국을 기독교화 함으로써 이룩하게 된 서양 문명 창조의 역사적 산실인 기독교는 이렇게 하여 태동하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심창섭,『기독교 교회사』,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998.
박경민,『크리스트敎史』, 靑木, 1999.
차하순,『서양사총론』, 探求堂, 1986.
민석홍,『서양사개론』, 三英社. 1984.
목차
Ⅰ. 머리말
Ⅱ. 기독교 박해의 원인
1. 정치적 배경
2. 종교적 배경
3. 사회적 배경
Ⅲ. 기독교 박해의 실태
1. 제1차 박해기간(A.D.64-96)
2. 제2차 박해기간(A.D.98-249)
3. 제3차 박해기간(A.D.249-313)
Ⅳ.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공인
Ⅴ.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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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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